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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급자족 Sep 28. 2024

가을 씨앗 파종(11)

가을 농사는 처음 지어본다.

찬란했던 여름작물에 행복해하지만,

찬바람 나는 가을에는 그냥 묵은 밭으로 내버려 두곤 했다.


사람들은 가을에 무, 배추를 심는다.

그렇지만 나는 그 작물을 심지 않았다.

봄에 파종한 열무에 벌레가 꼬이는 걸 봤다.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내 상황에 맞지 않는 작물 같았다. 무 농사가 지금은 어렵게 느껴진다.


오늘의 텃밭 방문 목적은 참외 영역을 정리하고, 자리에 시금치 파종을 하는 것이다.

 일 욕심이 많아 하루 종일도 일할 것이기에 '딱 1시간, 시금치 파종'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막상 텃밭에 도착하니, 고추가 병이 들어 다 뽑아내야 할 처지였다. 가지도 너무 주렁주렁 달려 일부 가지를 끊어줘야 할 것 같았다. 2주 전, 옆밭 할아버지께서 "고추도 뽑아버리고 가지도 다 따버리라"는 말씀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뽑지 않았다. 역시 어르신 말씀은 들어야 한다. 작물에 병이 들어 열매를 몇 개 따지도 못했다.


고추나무를 산더미처럼 꺾어와 땅바닥에 앉아 고추를 하나씩 땄다.

옆밭 아주머니께서 지나가시며 "땡볕에서 그렇게 고추를 따면 너무 덥잖아!"라고 하신다.


조용히 대답했다.

"제가 지금 고추를 따고 있긴 하지만,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는 것이기도 해요." 

"더워도 괜찮아요."


이 말에 아주머니는 의미심장하게 덧붙이신다.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하며 나도 미친 사람처럼 밭일했는데,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더라."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어 미친 듯이 일했는데, 안 죽어!"라고 하신다.


어떻게 아셨지? '스트레스'라고 표현했지만, 정말 딱 죽겠기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쉬지 않고 고추를 따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내 답답한 마음을 아셨나 보다.


며칠째 텃밭에 오고 싶었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 오지 못했다. 오늘 여유가 돼서 온 건 아니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텃밭에 들른 것이다.


빈 땅을 정리하고, 시금치, 루꼴라, 아욱씨를 추가 파종했다. 지난 9월 파종한 자리 중 싹이 나지 않은 곳에 추가 파종한 것이다.


씨를 뿌려야 열매를 맺는다. 그 씨가 자생으로 싹을 밀어 올리기 위해서는 바람과 물과 햇볕이 잘 맞아야 하기도 하다. 나도 씨를 뿌리는 중이긴 하다. 씨를 뿌리는 데 자꾸 싹이 올라오지 않아 답답했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구분하고, 바꿀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씨를 뿌리고 정성과 진심, 그리고 노력을 더해야겠단 생각을 해본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가 그 과정을 알고, 내가 그 결과를 받아들이면 된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기업에서 만든 장아찌 전용 간장을 구입했다.

고추를 깨끗이 씻어 꼭지를 따고 이등분한 후에 기업에서 만든 장아찌 간장을 부어놓았다.


고추 장아찌가 실패한다면, 대기업이 장아찌 전용 간장을 잘못 만들 걸로. 

가지는 얇게 썰어 말렸고, 남은 가지는 남편에게 반찬으로 소생시켜 주면 안 될까? 하고 부탁해 놓았다. 저녁에 귀가하면 분명 근사한 남편표 가지 반찬이 한가득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참외영역 정리전
씨앗 파종

 

부추, 잎우엉
아욱
루꼴라, 토란, 대파
모닝글로리(공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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