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미상

마흔, 내 인생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경숙아, 보고 싶다!

by 전대표

25살 가을, 친하게 지내던 분이 나에게 물었다.


"넌 부모님 중에 누굴 더 많이 닮았냐?"




어릴 때 나는, 내 얼굴이 무척 싫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지독히 못생겨서다.

뽀얗고 눈망울이 큰 아이들과 달리, 내 얼굴은 가무잡잡하고 눈만 말똥말똥했다. 예쁘게 생긴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난 왜 이렇게 못생겼을까, 거울을 볼 때마다 속상해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파마를 했다. 어쩌면 나의 못생긴 얼굴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내 별명은 라면이 되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지독히도 못생겼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침울했다. 어린 마음에 죽음을 생각해본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도 않지만. 엄마에게 “엄마, 난 왜 이렇게 못 생겼어?”하고 물었을 때, 엄마는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우리 아들이 얼마나 예쁜데!”


엄마의 그런 이야기는 전혀 힘이 되지 않았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쁘다고 한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1991년이었다. 태어나 처음 달려본 100미터 달리기에서 1등을 했다. 한참 달리는데 옆에 아무도 없었다.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니 저만치 아이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계속 달리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앞만 보고 달렸고, 1등을 했다. 그렇게 2학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타고난 체력, 운동능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2학년이 되자 2등, 3학년이 되자 3등, 4학년이 되자 4등, 5학년 때는 5등, 6학년이 되어서는 꼴찌만 했다. 100미터 달리기, 오래 달리기를 하면 나는 항상 꼴찌였다. 낮아진 자존감은 폭식으로 이어졌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비만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소위 말하는 찐따였다. 가무잡잡하고 못생긴 얼굴, 라면처럼 뒤엉킨 파마머리, 많이 먹어서 배만 나온, 자존감 낮은 초등학생에게 호감을 느낄 만한 여자아이들은 없었다. 당시엔 자존감이 낮아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몰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아주 위험한 경계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유년시절을 보낸 셈이었다.


6학년 때, 반에서 인기가 많은 여학생과 100미터 달리기를 하게 되었다. 당시 나보다 키가 크고 예쁜, 인기가 많은 여학생이었다. 그 여학생은 나와 같은 라인에 서 있는 걸 불쾌하게 생각했다. 자기 곁에 내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게 생각했고, 더러운 물건을 만지듯이 내 팔을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야, 나한테서 떨어져서 뛰어.”하고 이야기했다. 그 여학생은 계주 선수였기에 나보다 빨리 뛰었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6학년의 기억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살이 빠지고 키가 크기 시작했다. 뭔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어린 마음에 '아프리카 쌔깜디'와 같은 단어는 나에게 상당한 상처가 되었는데, 점차 '아프리카 쌔깜디'에서 '구릿빛 피부를 가진 학생'이라는 말을 듣곤 했다. 살이 빠지면서 콧대가 세워졌고, 볼살이 빠지면서 눈매가 달라졌다. 쌍꺼풀 수술했냐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짙은 쌍꺼풀이 생겼다. 하루가 멀다 하고 티격태격 싸우던 누나는 “야, 내 친구들이 니보고 김원준 닮았다더라.”라고 이야기했다. 1996년, 김원준은 한국의 최정상급 탑스타였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훌륭한 가수였다. 하지만 낮아진 자존감은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높아질 줄 몰랐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정상궤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키가 크고 늘씬한, 꽃보다 아름다운 여학생들이 주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여학생들이 내게 이성적인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추파를 던지고 있었음에도, 나는 잡을 줄 몰랐다. 추파였다는 것을 지레짐작하게 된 것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자연스러운 행동인지 알게 된 것도, 성인이 되고 난 뒤 한참이 지난 후였다.

고등학생이 되자, 초등학생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근 여고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여학생들과 썸을 탄 적도 있었고, 모르는 여학생에게서 문자나 전화가 온 적도 여러 번이었다. (당시엔 전화와 문자로 호감 있는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는 폰팅이라는 게 유행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수많은 남학생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여학생은 있기 마련이다. 큰 키에 조막만 한 얼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웃을 때 살짝 드러나는 덧니, 늘씬한 몸매, 뽀얗고 깨끗한 피부. 그야말로 꽃처럼, 아니 꽃보다 훨씬 아름답고 생기 발랄한 여학생 말이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도 그런 여학생이 있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그런 여학생. 수많은 남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여학생. 그러나 상당한 매력을 가진 남학생이 아니면 범접할 수 없는 여신과 같은 여학생. 그런 여학생과 썸을 탄다고 생각해보라. 비만, 작은 키, 찐따, 낮은 자존감, 소심한 성격을 모두 한 데 넣고 섞어서 만든 인간인 내가 그런 여학생과 썸을 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문제는, 낮은 자존감과 높은 자존심이었다. 낮은 자존감은 어딜 가나 문제였다.

2001년, 휴대폰이 대중화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때가 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나도 휴대폰이 필요했다. 때마침 아버지가 새로운 휴대폰을 구매하시면서, 당신이 쓰시던 휴대폰을 내게 주셨다. 성인 손바닥만 한, 일반 전화기처럼 생긴 구닥다리 애니콜이었다.

지금이야 초등학생도 갤럭시니 아이폰이니 들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지만,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2000년에는 그렇지 않았다. 최신식 휴대폰은 소위 말하는 '일진'들, 아니면 집에 제법 돈이 많은 학생들이나 들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주머니에서 최신식 애니콜(이런 게 판매되던 시절이 있었다.)이나 스타텍(이것도.)이 나오면 게임 끝이었다.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값비싼, 보기에 훌륭한 휴대폰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최소한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휴대폰이었다. 최신식 휴대폰이 아니더라도 좋았다. 당시 교복을 사면 공짜로 주는 휴대폰도 2만 원짜리 최신식 플립 휴대폰이었으니까. 손바닥만 한 구닥다리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여학생들 앞에서는 차마 주머니에서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창피했다. 그러나 차마 휴대폰을 새것으로 바꿔달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안 바꿔주실 게 뻔했기 때문이다. 멀쩡한 휴대폰을 뭐하러 바꾸냐는 핀잔과 함께.


당시 썸을 타던 여학생은 키가 제법 컸다. 168 정도 되었을까? 17살 여학생 치고는 상당히 큰 키였다. 뽀얀 얼굴, 통통한 볼살, 눈웃음이 매력적인 그 아이는 웃을 때 드러나는 덧니가 상당히 예뻤다. 낮은 자존감 때문에 차마 사귀어보자는 말 한마디 못해보고 여자 친구와 친구 사이에서 한참을 헤매던 그때에도 내게 먼저 전화를 걸어주고 문자를 보내주던 아이였다. 그리고 나와 만나는 날에는 굽이 높은 힐을 신고 나왔다. 나의 낮은 자존감을, 땅굴을 파고 더 깊게 파묻어주던 친구였다.

2000년 여름 무렵이었다.

이모집에서 2살이던 사촌동생과 놀고 있는데(그 동생은 얼마 전에 해병대에서 제대했다.)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네 집 근처에 왔는데 연락도 없느냐, 온 김에 얼굴이나 보자는 거였다. 나는 아기랑 놀던 옷차림으로 나갔고, 그 친구는 원피스에 굽이 높은 힐을 신고 나왔다. 안 그래도 큰 키가 더 커 보였다. 머리를 연노란색으로 염색했는데 어떠냐고 묻는 그 친구는 날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살짝 드러난 덧니, 반달처럼 예쁘게 보이는 눈, 통통한 볼살, 가느다란 허리. 솔직히 말해서, 정말 예뻤다.

그러나 머리 예쁘네, 하고 이야기했지만,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주머니에는 성인 손바닥보다 큰 휴대폰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최신형 애니콜을 갖고 있던 그 친구 앞에서 도저히 구닥다리 휴대폰을 꺼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던 그때의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친구랑 한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공부 이야기 등등.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래전 이야기라서 기억의 일부가 사라져 버린 것도 있지만, 그 친구에게 휴대폰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에, 어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현실이 일어나고 말았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문자가 왔다.

삐리리링.


문자 소리는 왜 그렇게 크던지.

나는 재빨리 몸을 틀어서 문자를 확인했고,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어버렸다. 그리고 "뭔데? 보자, 뭔데?"하고 궁금해하는 그 친구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구닥다리 휴대폰을 그 친구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지독한 창피거리였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유니크한 아이템이니 뭐니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한창 멋 부리고 다닐 나이에 들고 다녀야 했던 구닥다리 휴대폰은 안 그래도 낮은 자존감에 상당히 큰 타격을 입혔다. 급기야 나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 자리에서 "나 집에 갈게. 잘 가."하고 이야기해버렸고, 그 친구도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창피했다.


나는 그 여학생이 좋았다.

키가 크고, 예쁘고, 성격도 좋았으니까.

그 친구도 나를 좋아했다. 언젠가 나는 그 친구에게 '나, 너 좋아해.'라고 이야기했고, 그 친구도 나에게 '나도 네가 좋아. 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 하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사귀어보고 싶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내게는 참 과분한 여자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기에, 차마 이성친구로 만나보자고 이야기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후에 내가 먼저 그 여학생에게 연락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 친구에게 연락이 와도 대수롭잖게, 어쩌면 '너에게 연락이 와서 나는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 대꾸했고,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인사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지나쳤다. 그 친구는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모른 척 지나쳤다. 누구나 한 번쯤 뒤돌아볼만한 매력을 가진 그 친구를, 굽이 높은 힐을 신고 시크한 치마 정장을 입은 그 친구를 이성으로 느낀다는 게 상당히 잘못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또한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후줄근한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해 보였기 때문에 차마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 수가 없었다. 나처럼 촌스럽고 못난 남학생은 저렇게 예쁘고 착한 여학생과 어울리면 안 된다, 저 여학생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그 뒤로 드문드문 연락이 오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그 친구는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문득 20년이 지난 후에야 그 친구가 생각났다.



2001년에서 2021년.

어느덧 20년의 시간이 지났다.

학창 시절 나를 옭아매던 비만, 라면머리, 낮은 자존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군에서 제대하고 난 뒤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동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감사할 따름이다. 20대 중반부터 서른까지는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크고 작은 무대에서 활동해올 수 있었는데, 2,000명이 넘는 관객 앞에서도 떨지 않고 노래를 하며 연기할 수 있었던 것은 높은 자존감과 상황에 지배받지 않는 담대함 덕분이었다고 믿는다. 시간이 흘러 글을 쓰고 사업을 하고 있는 지금, 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나이가 들면서 제법 어른 소리를 듣다 보니, 안타깝게 흘려보낸 10대 시절이 떠올랐다. 그 여학생은 잘 살고 있을까? 좋은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을까? 지금도 그때처럼 예쁜 덧니를 갖고 있을까? 지나가버린 과거가 문득 생각났다. 그리고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최근에 아내와 대화를 나누던 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인생이 너무너무 아깝다."


내가 쓴 첫 책의 제목은 [교육의 힘]이었다.

그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나는 단 한 번도 10대로 돌아가고 싶은 적이 없었다. 왕따, 학교폭력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고 얽힐 만한 일도 없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낮은 자존감을 이길 수 있는 힘, 하루에도 수백 번씩 마음을 괴롭히는 부정적인 생각을 처리할 만한 마음의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성인이 되어 제법 선생 노릇을 하게 되면서부터 마음의 힘을 키우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습관화하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는데, 덕분에 나와 같은 암울한 10대 시절을 보내고 있을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쓰고 싶었다. 책을 출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되었고,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어느 순간, 어린 시절 봐온 부모님의 인생과 그때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버린 나의 인생이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분들이고, 또 존중하는 분들이다. 그분들의 인생이 없었다면 나와 누나의 인생도 없었을 것이고, 그분들의 노고와 수고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음에 감사하다. 부모가 되어보기 전에는 부모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새삼스레 느끼고 있다. 반면에 어른이 되고 나니, 부모님의 삶이 애처로워 보일 때도 있었다. 낮은 자존감과 피해의식으로 흘려버린 10대. 그건 분명히 나의 문제였지만, 부모님의 연약한 부분이기도 했다.

엄마와 아버지는 자존감이 낮은 분들이었다. 반면에 자존심과 고집은 상당히 강한 분들이었다. 부모님의 입에서, 마음에서, 긍정의 단어가 나온 기억이 내겐 별로 없다. 매사에 부정적인 분들이었고, 작은 일에도 한숨을 내쉬며 걱정을 하셨다. 어릴 때에는 그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부정적인 게 당연한 것인 줄로만 알았고, 그렇게 행동해야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누구나 가장 가까운 사람의 영향을 받으며 살지 않는가.

어린 시절 외모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폭식, 비만, 촌스러운 패션, 구닥다리 휴대폰, 낮은 학업성적, 별 볼 일 없는 지방대학교 졸업.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다. 어디 하나 특출 나게 뛰어난 면이 없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결코 부정적인 태도가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알고 난 뒤, 그토록 잊고 싶은 시간이었던 10대가 어쩌면 가장 찬란하게 빛날 수도 있었을 나의 10대일 수도 있었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 그제야 비로소 헛되이 흘려버린 나의 10대가 너무나 안타깝고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두 번 다시는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10대를 마친다는 생각에 무척 뿌듯해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올해, 나는 2번째 19살을 살고 있다. 두 번 다시는 부정적인 과거, 부정적인 사람들, 부정적인 기억들에 나를 묻어두지 않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다지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나의 40대가 얼마나 찬란할지, 또 얼마나 아름다울지 생각하면서, 후회와 실망, 또 근심 걱정 속에서 흘려버린 나의 10대를 곰곰이 추억해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불러본다.


"그립다, 나의 10대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믿음과 교만의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