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선생님

9. 아빠, 아빠, 아빠(초안)

by 전대표

어떻게 된 일인지 당시 상황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민재는 한참 뒤에야 문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리 엄마 아프리카 사람 아니야! 우리 엄마 욕하지 마!"하고 소리치며 홧김에 주먹으로 배를 때렸다. 거기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진 미선이의 배를 발로 차고 밟았다는 사실은,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울먹거리며 엄마에게 이른 미선이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야 알았다. 그 일이, 아버지가 학교로 불려와야 할 만큼심각한 일이었으리라곤 민재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민재가 봐온 세상은 어디까지나 어린 아이의 세계에 불과했으니까.

"쟤가 먼저 놀렸어요. 나보고 엄마 없는 애라고 그랬어요. 엄마가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놀렸어요. 우리 엄마가 외국사람이라고 그랬어요."

민재도 잘못한 것은 알았다. 사과하고 용서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억울했다. 아마 미선이의 엄마가 민재의 귀를 잡아당기며 "못되처먹은 것만 배워가지고!"라고만 말하지 않았어도, 민재는 용기를 내서 미안하다고, 너무 화가 나서 그랬는데 정말 미안하다고,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재는 이제 아홉살이었다. 모든 상황이 민재에게는 불리하게만 보였고, 미선이의 잘못을 이야기했다간 더 큰 문제가 생길 것만 같아 두려웠다. 민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잠자코 서 있었다. 두 다리가 떨려서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아이의 실수라고 생각하시고,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말이야. 지새끼가 예쁜 줄 알면 남의 자식도 귀한 줄 알아야지. 건방지게 말이야."

아버지는 민재의 어깨를 떠밀었다.

"민재야. 얼른 아주머니께 사과드려라. 친구한테도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어서."

아버지의 눈이 몹시 슬퍼보였다. 민재는 차마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안그러겠습니다."

쭈뼛거리며 서 있는 민재를 아버지가 미선이 쪽으로 슬쩍 밀었다. 미선이는 배를 부여잡은 채 민재를 뾰루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냈다.

"미안."

"흥!"

민재를 째려보던 미선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도 상황이 일단락된다 싶어서 민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 두번다시 내 딸한테 찝적거리지 마. 알겠니? 가자, 우리 딸!"

차갑게 쏘아붙이는 미선이 엄마의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교장선생님은 송구스럽다는 듯 재차 사과를 했다.

"애들이 같이 지내다보니 이런 일도 생겼는데,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좀 더 신경써서 교육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민재를 흘낏 쳐다본 뒤 아직까지 화가 안 풀렸는지 팔짱을 끼고 있는 미선이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이번에 새 학기가 시작되고 선생님들도 바뀌다 보니 애들도 아직 적응이 잘 안되었을 겁니다. 모쪼록 잘 관리하겠습니다. 노여움을 푸시지요."
교장선생님의 얼굴에 기름기가 번질거리는 게 보였다. 땀과 기름,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말투 속에 숨겨진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혀를 차며 민재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미선이 엄마의 치맛자락에서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났다. 미선이 엄마의 걸음걸이, 말투, 함부로 말하는 태도에서 민재는 눈물보다 오기가 발동했다. 고개 숙여 인사하기는 커녕, 따라가는 미선이의 얼굴을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아빠가 민재의 고개를 붙들고 억지로 숙이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민재를 한참 끌어안고는 교실로 밀어넣었다.


교실은 조용했다. 아이들은 민재를 쳐다보며 소곤소곤거렸다. '김민재 화이팅!'하고 속삭이는 녀석들도 있었다. 민재는 먼지나 공기가 되어 사라지고픈 마음이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수업종이 울리고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민재는 차마 고개를 들고 선생님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 때 선생님이 민재를 불렀다.

"어? 잘생김민재 어디 있지?"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민재를 가르키며 돌아보았다. 선생님은 이제야 찾았다는 듯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민재에게 이야기했다.

"아니, 민재는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 이거, 못생김민재로 이름을 바꿔야겠는데?"

선생님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민재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서, 민재는 선생님의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싶었다.

아이들은 잠자코 선생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선생님은 손가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리며 아이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선생님의 맑은 눈에 비친 아이들의 모습이 작은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이윽고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항상 발생해. 살다 보면 그런 문제들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지. 중요한 것은, 그런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어떻게 문제를 바라보느냐야.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고 생각하면 그 문제는 계속 어렵고 풀리지 않은 어려움으로 남겠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쉽게 풀리는, 사실 별 볼일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거야. 그렇지 않나?"

아이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듣고 이해하기엔 확실히 어려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민재의 잘못에 대해 전혀 문제삼지 않고 있으며, 야단을 치거나 호되게 매질을 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 순간, 민재의 마음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소망을 줄 수도 있으며, 반짝이는 별과 같은 행복을 전해주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민재는 선생님의 그림자를 통해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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