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세상에는 공부보다 중요한 게 더 많대. 진짜 친구를 사귀는 거랑, 인생에서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게 공부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어."
수진이가 민재의 손을 잡고 학교로 가며 이야기했다.
"의미있는 일? 그게 뭔데?"
"나도 몰라. 의미있는 일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공부 잘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거래."
"아, 그래."
"아빠도 그랬어. 우리가 학생이라서 학교에 가는 게 아니래. 인생은, 뭐, 뭘 위해서? 하여튼 뭘 위해서 학교에 가는 거래."
"그 뭐가 뭔데?"
"아, 공책에 적어놨는데, 잠시만."
수진이는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잠시 뒤적거리더니, 이윽고 적어둔 메모를 찾은 듯 책을 읽듯이 메모를 읽어주었다.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
"풍요? 풍요가 뭐야?"
"나도 몰라. 좋은 거겠지."
아빠라면 자세히 설명해줄텐데, 민재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아빠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 전에 책을 읽어줬대. 그래서 어릴 때 내가 말도 잘하고 아주 똑똑했대."
민재의 눈에도 수진이는 영리한 아이였다. 민재는 그런 수진이가 좋았다. 민재는 한번도 수진이에게서 '외국에서 온 아이'라던지 '엄마 없는 아이'와 같은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수진이는 아주 친절했고, 착한 친구였다.
"엄마랑 아빠가 그러는데, 사람은 모두 똑같대. 저 멀리 미국에 이모부가 사시는데, 영어도 엄청 잘하고 돈도 엄청 많이 버신대. 근데 이모부는 머리가 쌔까만데도 노랑머리 아저씨, 아줌마들이랑 같이 산대. 노랑머리 아저씨랑 아줌마도 똑같대. 진짜 놀랐어."
어떤 게 똑같다는 거야? 하고 물었지만, 민재도 어렴풋이나마 수진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랑머리 아저씨, 아줌마들도 우리랑 같은 사람이래."
흡사 주변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이야기하듯이, 수진이는 눈을 크게 뜨고 민재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민재와 수진이가 학교로 가는 길에 빈 공터에 먼지 묻은 옷을 입은 아저씨들이 고철드럼통 주위에 모여앉아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코를 흘쩍거리더니 카악, 퉤 하고 아무렇게나 침을 뱉었다. 누런 콧물과 가래가 뒤섞여 먼지 가득한 바닥에 떨어진 그 더러운 액체는, 발길로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는 아저씨의 발길질에 어디론가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런 아저씨의 모습이 무척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수진이가 쾌활하게 인사를 했다. 손등으로 콧물을 닦던 아저씨가 수진이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 그래. 학교 가나?"
"네."
아저씨는 수진이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얼굴 주위에는 둥그런 자국이 패여 있었다. 마스크 자국 같았다.
드럼통 주위에 앉아 불을 쬐던 아저씨들이 민재와 수진이를 보며 웃어주었다. 민재는 그 아저씨들의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이윽고 어색해져서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민재의 가방에는 딱지가 없었다. 혼이라도 날까 싶어 아빠와 할머니에겐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딱지를 가져가지 않는 게 옳은 행동이라고 민재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자신에게 실망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을, 민재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방에는 선생님이 테이프로 정성스레 붙인 공책과 책, 그리고 숙제가 있었다.
"학교에서 별 일 없었나?"
"네."
아빠가 가방을 검사하지나 않을까, 아침부터 민재는 조마조마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민재의 눈길은 연신 가방을 향해 있었다.
"그래, 학교에서 무슨 일 생기면 아빠한테 이야기하고. 잘 다녀온나."
"아야, 한 술 뜨고 가지 그냥 가노?"
방에서 나오신 할머니가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아빠의 등뒤에 대고 이야기했다.
"아침부터 작업이 있슴더. 일찍 오께예. 먼저 식사하이소."
"조심히 댕기온나이."
"예."
아빠는 손을 들어 인사하며 문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는 대문 밖까지 나가서 멀어져가는 아빠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거실로 들어왔다. 민재가 기억하는 오늘 아침의 풍경이었다. 반찬은 계란장조림과 멸치, 그리고 김치였다.
"야, 김민재. 딱지 가져왔냐?"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찬욱이가 물었다. 뭔가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아니."
"왜?"
"그냥."
"아이씨, 니랑 딱지치기 할려고 어제 새로 산 황금딱지 갖고 왔는데. 왜 안 갖고 왔어?"
"어, 미안."
찬욱이는 단단히 삐진 것 같았다.
"아빠가 쪽지시험 80점 맞았다고 용돈 줬단 말이야. 어제 황금딱지 사서 너랑 대결하려고 했는데."
"야, 최찬욱! 오늘 아침에 너희 아빠 만났다!"
"어? 어디서?"
찬욱이는 수진이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학교 오는 길에 공터에서 아저씨들이랑 불 앞에서 앉아 계시더라. 엄청 추우셨나봐."
"아, 맞어. 얼마나 추운데!"
"그래. 이따 집에 가면 아빠 이불 잘 덮어드려!"
"어."
수진이가 민재의 손을 잡고 학교에 올 때마다 얼레리꼴레리를 외치며 도망다니던 찬욱이는, 수진이의 말이 옳아서였는지 당돌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민재가 이야기했다.
"이따 마치고 우리 집에 가자. 우리 집에서 딱지치기하면 되지."
"그래, 그러자."
마지못해 수긍하는 듯한 찬욱이의 얼굴에는 웬지 모를 어두움이 깔려 있었다. 그 때 수진이가 민재와 찬욱이를 보며 물었다.
"야, 근데 너네 어제 숙제 다했어?"
"아, 맞다!"
찬욱이가 소리쳤다. 민재도 아차, 싶었다. 간단한 받아쓰기 숙제였지만, 받아쓰기 숙제는 민재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한글을 잘 모르는 민재는 받아쓰기 숙제를 할 때마다 매번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친구들이 한 거 배껴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황금딱지때문에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받아쓰기 숙제는 친구들이랑 하고 온나. 내가 눈이 침침해가 글씨도 잘 보인다마."
할머니의 목소리가 민재의 귓가에 맴돌았다.
"20분 남았어. 빨리 해!"
"야, 나 좀 보여주라."
찬욱이가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수진이는 쌀쌀맞은 말투로 거절했다.
"야, 그러지마. 선생님이 배낀 숙제는 내지 말라고 하였어."
"아, 좀 보여줘. 혼나기 싫단 말이야."
민재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잠자코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돼. 선생님이 숙제 배끼는 건 도둑질이라고 하셨어.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해."
"에이씨 진짜 치사하게 구네, 안봐!"
찬욱이는 화를 내며 공책을 아무렇게나 가방에 쑤셔넣었다.
"내가 혼나면 다 네 책임이야!"
"야, 그게 왜 내 책임이니? 숙제 안한 건 네가 잘못한 거잖아."
찬욱이는 수진이를 째려보았다. 수진이도 지지 않고 찬욱이를 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찬욱이가 고개를 돌렸다. 어린 마음에 자존심은 상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대화가 으레 그렇듯, 하나 둘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아이들 무리의 왁자지껄한 소리에 그들의 아웅다웅하는 모습도 차츰 묻혀버렸다.
선생님은 재미있고 친절한 분이었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한 분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이미 앞선 경험들 때문에 숙제를 잊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설령 깜빡 잊고 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친구들의 숙제를 배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태훈이가 미처 숙제를 해오지 않아서, 아침에 학교에 오자마자 미숙이의 숙제를 배낀 적이 있었다. 민재는, 그 때 처음으로 선생님의 화난 모습을 보았다. 선생님이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민재와 아이들은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선생님은 태훈이와 미숙이를 불러내서 큰소리로 소리쳤다.
"멍청한 녀석들. 숙제를 내 준 이유가 뭔지도 모르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너희들은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 돼. 혼자 생각하고 답을 찾아가면서 만들어지는 사색의 단계가 있어. 지금부터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앞으로 너희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단 말이다. 그런데 고작 친구들의 숙제를 배껴서 온다면, 너희들은 생각을 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고, 생각하는 기회도 가지지 못한 채로 시간을 허비하는거야! 남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 그까짓 지식 따위 배껴서 내놓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거냐? 그렇다면 틀렸어! 차라리 숙제를 안해왔었더라면 새로 배우기라도 하면 될텐데. 친구들보다 뒤쳐지는 게 싫다는 생각! 남들 다 해오는 숙제를 혼자 안해왔으니 부끄러움 당할 거라는 생각! 그 얄팍한 생각 때문에 이렇게 잘못된 일을 저지른다면, 앞으로 너희들의 미래는 절대 발전이나 성장 가능성이 없을 거다!"
아이들이 펑펑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선생님의 강한 호통소리도 끝이 났다. 그리고 잔뜩 혼이 나서 풀이 죽은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책상 서랍에서 초콜렛이 듬뿍 얹혀진 비스켓을 한 상자씩 손에 쥐어주곤 자리로 돌아가게 했다. 아이들은 눈물을 닦으면서도 손에 쥔 비스켓 상자는 놓치지 않고 꼭 쥐고 있었다.
그렇게 혼쭐이 난 뒤에도 코흘리개 꼬마 아이들 모두가 제때 숙제를 해올리는 만무했다. 안해오는 녀석들은 계속 안해왔다. 그럼에도 민재는, 숙제를 해오지 않는 아이들에게 큰소리로 야단을 치거나 혼을 내는 선생님의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숙제를 해오지 않은 녀석들은 선생님과 같이 글자쓰기 연습을 했다.
"선생님은 너희들과 같이 배우는 사람이란다.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야."
아이들에게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숙제 안해온 사람?"
선생님의 질문에 교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순미가 찬욱이의 옆구리를 찌르자 그제서야 찬욱이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아, 그래. 또 없나? 없으면 됐고."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수업을 시작했다.
선생님의 그런 모습이 아이들은 낮설지 않았다. 선생님은 마치 길을 걷다가 발견한 낙엽이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다가 마침 근처에 있던 하수구에 슬그머니 빠지는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숙제를 해오지 않은 아이들의 어리숙함을 대수롭지 않게 대했다. '숙제를 해오지 않은 것은 순전히 가정교육의 문제이며, 무엇보다 선생님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므로 그에 합당한 체벌이 필요하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야기하던 여느 선생님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선생님이 아이들을 둘러봤다. 선생님의 미소띈 얼굴에는 아이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할 만한 깊은 편안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있잖아." 선생님이 아이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어제 읽은 책에 좋은 내용이 하나 있어서 너희들한테 읽어주고 싶네."
그리고 선생님은 민재가 선생님의 책상 위에서 봤음직한 두꺼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어느 페이지를 펼친 뒤, 잠시 크음 하는 소리를 내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그 구절을 읽기 시작했다.
"선생님, 교회 다녀요?"
선생님이 그 책의 한 구절을 읽고 책을 덮자 미선이가 물었다. 민재는 미선이가 밥을 먹을 때나 중요한 일(그래봤자 자리배정할 때 진혁이랑 짝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하는 식이었지만, 어쨌든)이 있을 때 기도하는 것을 봐왔던 터라 그 질문이 미선이에게 퍽 어울리는 질문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아니." 선생님은 딱 잘라 말했다.
"찰스 디킨스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내용의 일부분이야. 제목은 <올리버 트위스트>란다."
'트위스트? 트위스트?' 하고 몇몇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책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야. 아주 어렵게 살던 소년이 모든 어려움과 문제를 이겨내고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선생님은 아이들을 둘러보며 이야기했다.
"놀랍게도 이 책은 200년 전에 쓰여진 책이란다. 선생님과 너희들의 부모님이 태어나시기 훨씬 이전에 쓰여진 책이지. 이 이야기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서 전해져 내려온 이유가 있을거야. 그 이유가 뭔지 한 번 이야기해볼 사람?"
"재밌어서요."
혜민이가 이야기했다.
"그렇지. 재미있어서야. 그런데 단지 재미있기만 해서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책이 팔릴 수 있었을까?"
"아니요."
아이들이 대답했다.
"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을거라고 생각해."
선생님이 또박또박하게,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이야기했다.
"어떤거요?"
"음,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운데, 작은 믿음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작은 믿음이라는 표현과 작은 믿음의 '믿음'에 관련한 행동이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표현인지 모르고 있던 아이들은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앉아있었다. 선생님이 이야기했다.
"아주 먼 옛날에 작은 믿음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은 성실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이름처럼 작은 믿음이 있었기 때뭉네 크고 작은 어려움-이를테면 두려움, 범죄, 누군가를 믿지 못하는 마음 같은 것-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었어. 이 책은 그 작은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선생님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쩌면 우리는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살면서 많은 문제들을 만날지도 몰라. 그 때, 가장 정확한 길로 가는 방법은, 끊임없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내가 가는 길이 어긋난 길이 아닌지 게속 확인하면서 가는 거야.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선택에 앞서서 나를 톺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 또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들을 주변에 많이 만들어두는 것이 아주 중요해."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기까지 민재는 선생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하기 시작했다.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들을 주변에 많이 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민재는 고민했다.
그 날밤, 아버지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