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항상 옳은 사람은 아니지만, 아빠가 항상 잘해왔다고도 할 수 없고 너희들에게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숨을 돌린, 어쩌면 눈물을 삼켰을지도 모를 아빠가, 붉어진 눈시울을 애써 감추며 이야기를 잇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걸리는지 민재는 속으로 세고 있었기에, 흰 천을 덮고 가만히 누워 있는 아빠를 보며 그날 밤 아빠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너희들은 아빠에게 최고의 선물이었고, 또 아빠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소망이 되어주었어. 정말 고마워."
소연이는 눈물이 떨어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자코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빠를 말없이 끌어안았고, 아빠는 소연이와 뒤늦게 아빠의 품에 안긴 민재를 끌어안고 숨죽여 울었다. 민재는 그 때, '어른도 때로는 운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빠가 운다.'
그것은 민재가 알고 있는 가장 큰 세계가 사실은 한 연약한 인간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빠의 눈물을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민재의 마음에 와닿았다.
지난 몇일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의 연속이었다.
약간은 푸른 빛이 감도는 병원의 전등과 이상하게 생긴 모자를 쓴 사람들, 까만 한복을 입고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3일 동안 우시던 할머니의 모습. 민재와 소연이를 한참 끌어안고 있다가, 이윽고 주머니에서 꺼낸 만원짜리를 두어 장 쥐어주며 "인제 마음 단단히 먹고 살아야 된다이."를 반복하던 이름 모를 아줌마, 아저씨들까지. 민재의 몇 일은 하얀색 천을 타고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다가 자리에 안착한 것처럼, 현실감각이 사라진 듯한 시간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가 없었다는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홉 살 어린 아이에게 삶과 죽음을 고민한다는 것은 세상이 허락한 가장 큰 슬픔과 고통이라고 이야기할지 모르겠지만, 이미 한 번 엄마와의 생이별을 경험한 민재는 아빠의 빈자리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빠와의 이별이 마음에서 크게 문제가 된다거나 두려움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만 어려움이 있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재야, 괜찮아?"
3일만에 학교에 갔다. 수진이와 찬욱이, 그리고 평소 가깝게 지내지 않던 친구들까지 우루루 몰려와서 민재를 위로해주었다.
"우리 엄마가 너 갖다주라고 하셨어."
준석이는 눈이 두 배는 더 커보이는 돋보기 안경을 통해 민재를 바라보며 하얀 봉투를 건넸다.
"어? 이게 뭐야?"
"몰라. 엄마가 너 수고했다고 갖다드리래. 그리고 언제든지 배고프면 우리 집에 와서 밥먹고 놀다 가도 된다고 하셨어. 오늘 와도 되고."
"어, 고마워."
친구들의 관심이 어색했던 민재는, 준석이의 그런 말이 무척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차마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가 부끄러워서 꾹 참으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때였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민재를 보자마자 잰걸음으로 다가와서 민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민재는 선생님의 가슴에 안겨 소리내어 울었다.
선생님은 아빠의 장례식장에서도 그렇게 민재를 끌어안았다. 민재는, 그 때까지 눈물을 잘 참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선생님의 말을 듣기까지는.
"선생님은 항상 민재 곁에 있을거야. 선생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민재를 떠나지 않을게. 약속할게."
선생님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민재는 그 때 처음으로 어른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푸른 빛이 맴도는 장례식장의 차가운 분위기에서 선생님의 품은 민재의 마음을 따듯하게 데워주기에 충분했다. 선생님은 민재와 눈높이를 맞추고 민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물로 범벅이 된 민재의 얼굴을 옷소매로 닦아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다 잘 될거야."
손수건으로 민재의 얼굴을 닦아주던 선생님의 손과 입술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 선생님은 그 때의 따뜻함을 민재가 다시금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홀로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향해, 선생님의 마음에 담긴 따뜻한 소망을 전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참동안 민재를 꼭 안고 있던 선생님은 민재에게 작게 속삭여주었다.
"새로운 시작이야. 단지 새로운 시작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