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질을 결정하는 것
어릴 적 학원을 다니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그 말:
모두에게 24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진다
학생 때는 이 말을 들으면 그렇구나 하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옆자리 짝꿍을 이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24시간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나요?
결론부터 말하면 저 말은 인간의 능률이라는 변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시간을 절댓값으로 측정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느냐(billable hour)로 측정합니다. 즉 학생의 1시간과 CEO의 1시간의 값은 다릅니다.
시간의 질이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퇴근하고 공부하러 왔는데 문자로 이별 통보를 받았거나 집에 물이 새면 당연히 그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고정적 그리고 변동성 변수들의 상호작용에 따라 어떤 사람은 30대에 출퇴근 지옥철과 24시간의 노예로 전락하고, 어떤 사람은 시간의 주인이 되어 원격 근무를 하며 남는 시간에 운동을 하고 책을 읽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시간을 뺏어가고 있을까요?
세상에는 지병이나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분명 있는데, 한국에서는 이것에 대한 논의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시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회기반을 흔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나 내 가족에게 질병, 장애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하고 병원에 가느라 가용 시간과 능률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려우니 인적 자원에서 뭔가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은 큰 페널티입니다.
미국처럼 부자들이 멀리 떨어져 사는 나라도 있지만, 서울공화국인 한국에서는 대체로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통근 시간이 늘어납니다. 통근 시간만 늘어나느냐? 친구 만나는 시간, 동호회 활동하는 시간, 연애하는 시간 모두가 같이 늘어납니다. 1-2시간 넘게 지하철을 갈아타 가며 다니는 사람들은 시간도 잃고 체력도 잃습니다. 심지어는 부부의 통근시간이 길수록 이혼 확률과 비례한다는 조사도 있습니다. 같이 보내는 시간의 양과 질이 모두 감소하면서 벌어지는 비극입니다.
신체적으로 힘들거나 위험한 일자리는 건강을 깎아먹으며, 이는 곧 일터 밖에서 능률과 시간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신적으로 힘든 일자리도 있습니다. 주로 민원이나 환자 혹은 특수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직업이 대표적이며, 일반적인 일자리라도 상사나 직원들의 인성이 나쁘고 서로를 험담하기 바쁘다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런 곳을 참고 다니다가는 신경성 질환이나 성격장애를 얻을 수도 있고, 잠이 안 오거나 손이 떨리는 등 신체적 장애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몸 상태가 이 지경까지 오면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멀쩡하던 가족, 연인관계도 파탄 나게 됩니다.
판데믹으로 인해 크게 재조명된 분야입니다. 미국 직장인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 따르면, 72%의 직장인들이 월급을 10% 올려주고 주 5일 근무를 하느니 유연근무를 선호하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특히 젊은 층의 2/3은 유연근무가 아예 없는 직장은 고려하지도 않겠다고 답했습니다. 돈을 더 줘도 출퇴근은 싫다는 것입니다.
2021년 이후 유연근무에 대한 연구가 계속 발표되면서 이제 경제학자들은 근로자들이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는 특권에 생각보다 많은 프리미엄을 붙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내 스케줄을 정하지 못하는 경찰, 간호사, 운전사 같은 직종은 돈과 명예를 얻더라도, 내 시간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 요소들을 모두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92년생 내러티브 두 개를 만들어 볼 수 있습니다.
영희는 주 5일 복지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사입니다. 수도권에서 출퇴근하는 데 편도 2시간을 사용하고 있으며, 남동생은 장애가 있어 밥을 차려주는 것을 돕고 나가야 합니다. 직장에서 영희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떼쓰는 민원인들에게 시달리고, 직장 상사는 시답잖은 남자친구 얘기나 물어보고 스트레스를 줍니다. 집에 돌아오니 이미 7시가 넘었고 지친 영희는 배달 음식을 시켜놓고 넷플릭스를 봅니다. 오늘 진상에 시달렸기 때문에 영어 공부는 일단 미루기로 합니다. 치킨을 먹다 보니 핸드폰에 전남친 부재중 통화가 와있습니다. 둘은 어플로 만났지만 2시간 넘는 거리 때문에 계속 싸웠고 상처만 남겼습니다. 넷플릭스에 나오는 행복한 커플들의 삶을 보며 영희는 진지하게 상담을 받아봐야 하나 하고 고민합니다.
지희는 IT 스타트업에서 유연 근무하는 마케터입니다. 마침 집이 판교여서 출퇴근은 자전거로 하고, 주 2일은 집 근처 카페에 가서 근무합니다.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면서 팟캐스트를 듣습니다. 지희의 직장 분위기는 자유로우며 자기계발을 위한 지원, 워크샵이 지원됩니다. 직원들은 여름휴가를 이용해 해외여행을 갑니다. 작년에 키르기스스탄을 갔다 온 지희는 브런치북 응모에 당첨된 출간 작가이기도 합니다. 글은 퇴근하고 카페에 앉아서 썼습니다. 집중이 안될 때는 집 근처 헬스장에 갔다 옵니다. 내년에는 자전거 동호회에서 만난 남친과 결혼하기 위해 투자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이 둘에게는 정량적으로 24시간이 똑같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영희에게 매우 적으며, 그중에서도 온전한 정신으로 무언가를 배우거나 도전할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적습니다. 반면 지희가 가진 가용시간은 조금씩 쌓이면서 건강과 지식, 인간관계에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둘의 현재 월급은 크게 차이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격차는 점점 벌어질 것입니다.
영희와 지희의 스토리가 시사하는 바는 직장인들에게 큰 고민거리를 던져줍니다. 내가 지금 살고 일하고 있는 곳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면,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투자할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마저도 쉽게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계속 불행의 늪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이 건강한 신체, 멘탈을 가질 리 없고 결국 성격과 인간관계조차 버리게 됩니다. 내가 가장 어려울 때 필요한 인간관계가 정작 그 순간에는 모두 떠나고 없다는 현실은 인간을 정말 비참하게 만듭니다. 이 악순환을 실제로 경험해 본 사람이면 얼마나 거지 같은 상황인지 알 것입니다.
탈출구를 만드는 현실적인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강철 멘탈이 될 수는 없으니 "나는 이 환경에서 나간다"는 확신을 갖고 조금씩 준비하면 됩니다. 무언가를 준비하거나 수업을 들어야 한다면 미래를 위해서 거기에 돈을 과감히 투자해야 하고, 내가 온전한 정신으로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을 무조건 늘려야 합니다. 환경을 바꾸지 않고 "내 멘탈만 강해지면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본인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마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내 시간의 질을 깎아먹는 환경적 요인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