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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Oct 24. 2019

브라질 잡식문화의 매뉴얼, 식인종 선언(1928)

포르투갈어 문학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발견하기 전에, 브라질은 행복을 발견했다.


브라질의 역사는 한국이나 중국처럼 일자형이 아닙니다. 태초부터 그곳에 살았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도착한 이후 모두 말살당하거나 자취를 감추었고,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고 보니 멀리 유럽 땅에서 건너온 백인들과 강제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사실상 브라질의 창립멤버가 되었습니다. 이 문화적 비빔밥 같은 나라의 정체성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20세기 브라질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텍스트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식인종 선언'을 택할 것입니다. 브라질의 시인이자 전위예술가로 현대예술주간에서 악명을 떨쳤던 오스왈드 지 안드라지는 1928년, '무엇이 브라질적인 것인가?' 라는 세기의 질문을 놓고 '식인 문화' 라는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길고 난해한 선언은 2009 서울대학교 남미연구 저널인 '트랜스라틴' 번역되어 실린  있으나, 어렵게 쓰여 있어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여기에 올립니다.  선언의 많은 부분은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서 '토템과 터부(1913)' 에서 기인합니다. 프로이트의  파격적인  책에서 오스왈드가 주목한 부분은 '적과의 화해'로써의 터부였습니다.  살해당한 적을 먹음으로써 그의 힘을 얻고,  속죄를 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오스왈드는 여기서 나아가 브라질 역시  문화를 거침없이 공격해 잡아먹어 섭취할  있는 역량을 가져야 한다는 굉장히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는 후에 트로피칼리아(Tropicalia) 운동의 기반이 되었으며 보사노바와 유난히 잡식성이 강한 브라질 현대음악(MPB)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20년대는 불과 몇십 년 전 독립을 이룩한 라틴아메리카의 신생 국가들이 유럽의 문화와, 정복자들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된 전통문화 사이에서 여전히 어느 길을 갈지 갈등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수입 대신 가공 수출을 하자!'라는 오스왈드의 선언은 당시에는 파격적이었으나, 진정 브라질적인 문화의 첫 단추를 끼웠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읽히고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 한국에서도 고 백남준 선생께서 "강철이빨, 즉 강력한 문화 수용력과 응용력을 가지라"는 말을 남기신 바 있습니다.)


MANIFESTO ANTROPÓFAGO
(Oswald de Andrade, 1928)


Só a Antropofagia nos une. Socialmente. Economicamente. Filosoficamente.
오직 식인주의만이 우리를 단결시킨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철학적으로.


Única lei do mundo. Expressão mascarada de todos os individualismos, de todos os coletivismos. De todas as religiões. De todos os tratados de paz.
세상의 유일한 법칙. 모든 개인주의와 모든 집단주의, 모든 종교, 모든 평화조약의 가장된 표현.


Tupi, or not tupi that is the question.
투피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로다.*
(*브라질의 원주민인 투피족의 이름이 햄릿의 명대사, To be or not to be와 비슷하게 들리는 점을 가지고 패러디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셰익스피어를 ‘잡아먹고’ 있습니다.)


Contra todas as catequeses. E contra a mãe dos Gracos.
모든 교리문답에 반대한다. 그리고 그라쿠스의 어머니*에도.
(*그라쿠스의 어머니는 신사임당 같은 모범적 여성으로 고전에 등장합니다.)


Só me interessa o que não é meu. Lei do homem. Lei do antropófago.
나는 내 것이 아닌 것에만 신경 쓴다. 인류의 법칙. 식인종의 법칙.


Estamos fatigados de todos os maridos católicos suspeitosos postos em drama. Freud acabou com o enigma mulher e com outros sustos da psicologia impressa.
우리는 드라마에 나오는 의심 많은 가톨릭 남편들에게 지쳤다. 여성의 수수께끼와 그 외 형편없는 심리학 출판물들은 프로이트에 의해 해결되었다.


O que atropelava a verdade era a roupa, o impermeável entre o mundo interior e o mundo exterior. A reação contra o homem vestido. O cinema americano informará.
현실을 짓밟았던 건 사실 옷이었다, 그 내면과 외면 사이의 투과할 수 없는 층. 옷 입은 인간에 대한 저항. 미국 영화가 설명해 줄 것이다.


Filhos do sol, mãe dos viventes. Encontrados e amados ferozmente, com toda a hipocrisia da saudade, pelos imigrados, pelos traficados e pelos touristes. No país da cobra grande.
태양의 아들들, 모든 생명체들의 어머니. 모든 가장된 노스탤지어와 함께, 팔려온 노예들과 여행객들에 의해 치열하게 만났고 사랑했던. 거대한 코브라의 땅에서.


Foi porque nunca tivemos gramáticas, nem coleções de velhos vegetais. E nunca soubemos o que era urbano, suburbano, fronteiriço e continental. Preguiçosos no mapa-múndi do Brasil.
그건 우리가 문법도, 오래된 식물도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도심과 변두리, 개척지와 대륙이 무엇인지도 몰랐었다. 브라질의 세계지도 속 게으름뱅이들.


Uma consciência participante, uma rítmica religiosa.
참여하는 의식, 종교적인 리듬.


Contra todos os importadores de consciência enlatada. A existência palpável da vida. E a mentalidade pré-lógica para o Sr. Lévy-Bruhl estudar.
수입되는 모든 통조림된 양심을 거부한다. 만질 수 있는 삶의 존재. 그리고 논리 이전의 정신세계의 연구는 레비-브륄 선생*에게 남겨 놓는다.
(*루시앙 레비-브륄(1857-1939): 프랑스의 인류, 사회학자이며 ‘원시적 사고’ 와 ‘서구적 사고’ 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이분법적 이론을 제창했습니다.)


Queremos a Revolução Caraiba. Maior que a Revolução Francesa. A unificação de todas as revoltas eficazes na direção do homem. Sem nos a Europa não teria sequer a sua pobre declaração dos direitos do homem.
우리는 카리브 혁명을 원한다. 프랑스혁명보다도 거대한. 인간에게로 향하는 모든 효과적인 혁명의 연합을. 우리가 없었더라면 유럽은 그 보잘것없는 인권 선언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A idade de ouro anunciada pela América. A idade de ouro. E todas as girls.
아메리카에 의해 발표된 황금시대. 황금시대. 그리고 모든 걸(girl)들.


Filiação. O contato com o Brasil Caraíba. Oú Villegaignon print terre. Montaigne. O homem natural. Rousseau. Da Revolução Francesa ao Romantismo, à Revolução Bolchevista, à Revolução Surrealista e ao bárbaro tecnizado de Keyserling. Caminhamos.
친자확인. 브라질의 캐리비안과의 조우. 빌레가뇽이 땅이라 적은 곳*. 몽테뉴. 자연인. 루소. 프랑스혁명에서 낭만주의까지, 볼셰비키 혁명, 초현실주의 혁명 그리고 키슬링의 기술적 야만까지. 우리는 함께 걸어 나간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수상록’ 저자 몽테뉴의 책에서 브라질을 이렇게 칭했습니다. 서구 문화에 항상 회의적인 태도를 가졌던 몽테뉴는 브라질의 야만 식인종들이 어떻게 보면 문명화된 우리들보다 덜 잔인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던진 바 있습니다. On Cannibals - Montaigne 참조.)


Nunca fomos catequizados. Vivemos através de um direito sonâmbulo. Fizemos Cristo nascer na Bahia. Ou em Belém do Pará.
우리는 교리문답을 받은 적이 없다. 우리는 몽유병 걸린 법을 통해 살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이아에서 나게 했다. 아니면 벨렝 두 파라에서.


Mas nunca admitimos o nascimento da lógica entre nós.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서 탄생한 논리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


Contra o Padre Vieira. Autor do nosso primeiro empréstimo, para ganhar comissão. O rei-analfabeto dissera-lhe : ponha isso no papel mas sem muita lábia. Fez-se o empréstimo. Gravou-se o açúcar brasileiro. Vieira deixou o dinheiro em Portugal e nos trouxe a lábia.
비에라 신부*에 반대한다. 수수료를 받아먹기 위해 우리의 첫 대출을 했던 장본인. 문맹의 왕이 그에게 말했었다: 종이에 이걸 쓰게나, 미사여구는 빼고. 그렇게 대출은 이루어졌고 브라질의 설탕에 세금이 매겨졌다. 비에라는 돈은 포르투갈에 놓아두고 우리에게 미사여구만을 가져다주었다.
(*안토니오 비에라 신부(1608-97): 포르투갈의 예수회 신부였으며 포르투갈-네덜란드 전쟁 당시 브라질 북부 뻬르낭부꾸를 팔아넘기는 평화 조건을 제시해 ‘브라질의 유다’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수사학과 웅변에 능했던 비에라를 오스왈드가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O espírito recusa-se a conceber o espírito sem o corpo. O antropomorfismo. Necessidade da vacina antropofágica. Para o equilíbrio contra as religiões de meridiano. E as inquisições exteriores.
영혼은 신체 없이 영혼을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의인화 작업. 식인종 백신의 필요성. 서방 종교와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그리고 외부의 종교재판에 대해서도.


Só podemos atender ao mundo orecular.
우리는 오직 들리는 세계에 대해서만 신경을 쓸 수 있다.


Tínhamos a justiça codificação da vingança. A ciência codificação da Magia. Antropofagia. A transformação permanente do Tabu em totem.
우리는 법제화된 복수로써의 정의를 가졌었다. 법제화된 마법으로써의 과학. 식인 풍습. 터부의 영구적인 토템화.


Contra o mundo reversível e as idéias objetivadas. Cadaverizadas. O stop do pensamento que é dinâmico. O indivíduo vitima do sistema. Fonte das injustiças clássicas. Das injustiças românticas. E o esquecimento das conquistas interiores.
뒤집을 수 있는 세계와 객관화된 사상들에 반대한다. 시체화된 것들. 다이내믹한 생각의 스탑(stop). 시스템의 피해자로서의 개인. 고전적인 불의와, 로맨틱한 불의의 기원. 그리고 내부적인 정복에 대한 망각.


Roteiros. Roteiros. Roteiros. Roteiros. Roteiros. Roteiros. Roteiros.
각본들. 각본들. 각본들. 각본들. 각본들. 각본들. 각본들.


O instinto Caraíba.
캐리비안 본능.


Morte e vida das hipóteses. Da equação eu parte do Cosmos ao axioma Cosmos parte do eu. Subsistência. Conhecimento. Antropofagia.
가설들의 죽음과 삶. 코스모스에서 기인하는 나-공식에서, 나에게서 기인하는 코스모스의 공리로. 생존. 지식. 식인 풍습.


Contra as elites vegetais. Em comunicação com o solo.
식물화된 엘리트에 맞서. 혼자와 대화하며.


Nunca fomos catequizados. Fizemos foi Carnaval. O índio vestido de senador do Império. Fingindo de Pitt. Ou figurando nas óperas de Alencar cheio de bons sentimentos portugueses.
우리는 교리문답을 받은 적이 없다. 우리가 만든 건 카니발이었다. 제국의 상원의원으로 변장한 인디오. 피트(Pitt)*인 척하면서. 아니면 좋은 포르투갈적 감정으로 가득한 알렌카의 오페라**에 출연하면서.
(*피트 수상(1759-1806): 인도 식민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유명한 달변가였던 영국의 수상입니다.
**알렌카의 오페라: 그의 대표 소설이자 오페라화 된 ‘과라니’를 가리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인디오가 문명화된 척하는 것을 꼬집은 것입니다.)


Já tínhamos o comunismo. Já tínhamos a língua surrealista. A idade de ouro.
우리는 공산주의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초현실주의 언어도 이미 가지고 있었다. 황금시대.


Catiti Catiti
Imara Notiá
Notiá Imara
Ipeju
카티티 카티티
이마라 노티아
노티아 이마라
이페주*
(*투피 인디오 언어로 “새 달아, 새 달아, 내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나의 기억을 불어넣어 다오” 라는 뜻입니다.)


A magia e a vida. Tínhamos a relação e a distribuição dos bens físicos, dos bens morais, dos bens dignários. E sabíamos transpor o mistério e a morte com o auxílio de algumas formas gramaticais.
마법과 삶. 우리는 물질적, 도덕적, 그리고 명예적 재화의 관계와 분배를 가지고 있었었다. 우리는 또한 몇 가지 문법 형식의 도움을 받아서 미스터리와 죽음을 치환하는 법도 알고 있었다.


Perguntei a um homem o que era o Direito. Ele me respondeu que era a garantia do exercício da possibilidade. Esse homem chamava-se Galli Mathias. Comia.
나는 한 남자에게 옳음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내게 가능성의 실현이 보장되는 것이라 대답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갈리 마테아스*였다. 나는 그를 잡아먹었다.
(*Galimatias: 몽테뉴의 책에서 나온 프랑스어로 ‘넌센스’라는 뜻입니다.)


Só não há determinismo onde há mistério. Mas que temos nós com isso?
결정론이 없는 유일한 곳은 미스터리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가?


Contra as histórias do homem que começam no Cabo Finisterra. O mundo não datado. Não rubricado. Sem Napoleão. Sem César.
케이프 피니스테하*에서 출발한 인간들의 역사에 맞서. 달력 없는, 법규 없는 세계. 나폴레옹도, 시저도 없는.
(Cabo Finisterra: 현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컴포스텔라 근처의 항구도시로, 직역하면 ‘세상의 끝’이라는 지명입니다.)


A fixação do progresso por meio de catálogos e aparelhos de televisão. Só a maquinaria. E os transfusores de sangue.
카탈로그와 텔레비전에 의해 고착화되는 발전. 기계뿐이다. 그리고 수혈기.


Contra as sublimações antagônicas. Trazidas nas caravelas.
카라벨 범선에 실려 온 적대적 승화에 반대한다.


Contra a verdade dos povos missionários, definida pela sagacidade de um antropófago, o Visconde de Cairu: – É mentira muitas vezes repetida.
식인종이었던 카이루의 자작*의 지혜에 의해 정의 내려진 선교사들의 진리에 반대한다. 그건 반복되어 온 거짓말이다.
(*José de Silva Lisboa(1756-1835): 브라질의 항구를 개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카이루의 자작입니다.)


Mas não foram cruzados que vieram. Foram fugitivos de uma civilização que estamos comendo, porque somos fortes e vingativos como o Jabuti.
하지만 우리에게 온 건 십자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먹어치우고 있던 문명의 피난민들이었다, 왜냐면 우리는 자부치 거북처럼 강인하고 복수심 강한 존재들이니까.


Se Deus é a consciência do Universo Incriado, Guaraci é a mãe dos viventes. Jaci é a mãe dos vegetais.
만약 신이 만들어지지 않은 우주의 의식이라면, 과라씨는 모든 생물의 어머니이다. 자씨는 식물의 어머니이다.


Não tivemos especulação. Mas tínhamos adivinhação. Tínhamos Política que é a ciência da distribuição. E um sistema social-planetário.
우리는 추측이 없었지만, 예언은 있었다. 우리는 분배의 과학으로써의 정치가 있었다. 또한 행성-사회제도도.


As migrações. A fuga dos estados tediosos. Contra as escleroses urbanas. Contra os Conservatórios e o tédio especulativo.
이민들. 지루한 국가들로부터의 도망. 도시의 경화에 맞서. 컨서바토리와 사색적 지루함에 맞서.


De William James e Voronoff. A transfiguração do Tabu em totem. Antropofagia.
윌리엄 제임스에서 보로노프*까지. 터부에서 토템으로의 변환. 식인 풍습.
(*William James(1842-1910): 미국의 심리학자. 종교적 체험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Serge Voronoff(1866-1951): 러시아의 생물학자. 식물의 접합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O pater famílias e a criação da Moral da Cegonha: Ignorância real das coisas+ fala de imaginação + sentimento de autoridade ante a prole curiosa.
가부장제와 황새 우화의 창조: 실제에 대한 무지함 + 상상력의 부재 + 호기심 많은 자손들 앞에서의 권위주의.


É preciso partir de um profundo ateísmo para se chegar à idéia de Deus. Mas a caraíba não precisava. Porque tinha Guaraci.
신이라는 관념에 도달하려면 뿌리 깊은 무신론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카리브 인들에겐 그런 건 필요 없었다. 그들에겐 과라씨가 있었으니까.


O objetivo criado reage com os Anjos da Queda. Depois Moisés divaga. Que temos nós com isso?
피조물은 타락한 천사와 같이 대응한다. 그 이후 모세는 떠돌아다닌다. 이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Antes dos portugueses descobrirem o Brasil, o Brasil tinha descoberto a felicidade.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을 발견하기 전에, 브라질은 행복을 발견했었다.


Contra o índio de tocheiro. O índio filho de Maria, afilhado de Catarina de Médicis e genro de D. Antônio de Mariz.
횃불을 높이 든 인디오에 반대한다. 마리아의 아들,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대자이자 돈 안토니우 지 마리즈의 사위인 인디오.


A alegria é a prova dos nove.
기쁨은 정상성 테스트이다.*
(*Prova dos nove: 수학적 검산 방식입니다. 시스템 등의 정상성 테스트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입니다.)


No matriarcado de Pindorama.
핀도라마*의 모계사회 안에서.
(*Pindorama: 브라질은 투피족 언어에서 핀도라마라고 부릅니다.)


Contra a Memória fonte do costume. A experiência pessoal renovada.
습관의 기원으로써의 기억에 반대한다. 새로 쓰이는 개인의 경험.


Somos concretistas. As idéias tomam conta, reagem, queimam gente nas praças públicas. Suprimarnos as idéias e as outras paralisias. Pelos roteiros. Acreditar nos sinais, acreditar nos instrumentos e nas estrelas.
우리는 구체적인 것만을 신봉한다. 사상들은 점령하고, 반응하고, 광장에서 사람들을 불태운다. 사상들과 다른 마비 증세를 억누르자. 각본에 따라. 우리의 전조들을 믿고, 기계들과 별들을 믿는다는 것.


Contra Goethe, a mãe dos Gracos, e a Corte de D. João VI.
괴테와, 그라쿠스의 어머니와 동 주앙 6세의 궁정에 반대한다.


A alegria é a prova dos nove.
기쁨은 정상성 테스트이다.


A luta entre o que se chamaria Incriado e a Criatura – ilustrada pela contradição permanente do homem e o seu Tabu. O amor cotidiano e o modus vivendi capitalista. Antropofagia. Absorção do inimigo sacro. Para transformá-lo em totem. A humana aventura. A terrena finalidade. Porém, só as puras elites conseguiram realizar a antropofagia carnal, que traz em si o mais alto sentido da vida e evita todos os males identificados por Freud, males catequistas. O que se dá não é uma sublimação do instinto sexual. É a escala termométrica do instinto antropofágico. De carnal, ele se torna eletivo e cria a amizade. Afetivo, o amor. Especulativo, a ciência. Desvia-se e transfere-se. Chegamos ao aviltamento. A baixa antropofagia aglomerada nos pecados de catecismo – a inveja, a usura, a calúnia, o assassinato. Peste dos chamados povos cultos e cristianizados, é contra ela que estamos agindo. Antropófagos.
말하자면, ‘만들어지지 않은 것’과 피조물 사이의 투쟁은—인류와 그의 터부 사이의 영원한 모순에 의해 설명된다. 매일매일의 사랑과 자본주의적 생활 양식(modus vivendi). 식인 풍습. 신성한 적의 흡수. 그를 토템화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모험. 이 땅에서의 최후. 그러나, 오직 순수한 엘리트들만이 삶의 최고의 의미와 프로이트에 의해 규정된 교리문답적 악습에서 벗어난 육체적 식인 풍습을 실제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건 성적 본능의 승화가 아니다. 이건 식인 본능의 온도계이다. 육체적인 바탕에서, [식인 본능은] 선택적으로 변하며 친근감을 조성한다. 감정적이면 사랑, 추측적이면 과학을 만든다. 스스로에서 일탈하며 또 변화한다. 그리고 우리는 악마화에 도달한다. 저열한 식인 풍습은 교리문답의 죄들과 뭉쳐졌다—시기, 고리대금, 비방, 그리고 살인. 우리가 맞서는 것은 바로 이 소위 문명화되고 기독교화된 사람들의 전염병이다. 식인종들.


Contra Anchieta cantando as onze mil virgens do céu, na terra de Iracema, – o patriarca João Ramalho fundador de São Paulo.
이라세마의 땅에서 하늘에 있는 1만 1천 처녀들을 노래하는 안쉬에타*에 반대한다—상파울루의 창립자, 가부 쥬앙 하말류.
(*안쉬에타 신부(1534-97): 브라질 최초의 예수회 신부들 중 한 명이자, 1554년 상파울루의 창립을 도왔습니다.
쥬앙 하말류: 포르투갈 개척자로 브라질에 왔다가 난파당한 이후, 인디언들과 친분을 맺고 1554년 상파울루 창립 당시 인디언들을 조직해 예수회에 맞서 싸웠습니다.)


A nossa independência ainda não foi proclamada. Frase típica de D. João VI: – Meu filho, põe essa coroa na tua cabeça, antes que algum aventureiro o faça! Expulsamos a dinastia. É preciso expulsar o espírito bragantino, as ordenações e o rapé de Maria da Fonte.
우리의 독립은 아직 선언되지 않았다. 동 쥬앙 6세의 전형적인 구절: —아들아, 다른 모험가가 뺏기 전에 어서 이 왕관을 쓰거라!* 우리는 왕조를 쫓아냈다. 마리아 다 폰치**의 칙령들과 콧담배, 브라간자 왕조의 정신도 쫓아낼 필요가 있다.
(*1822년 브라질의 독립을 둘러싸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일찌감치 브라질의 독립을 예감한 동 쥬앙 6세가 포르투갈로 돌아가면서 왕자 동 뻬드루에게 한 말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Maria de Fonte: 1846년 포르투갈에서 자유주의적 헌장 세력(Cartista)에 대항해 일어난 반란의 주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여기에서는 포르투갈적이고 보수적인 여인상으로 해석됩니다.)


Contra a realidade social, vestida e opressora, cadastrada por Freud – a realidade sem complexos, sem loucura, sem prostituições e sem penitenciárias do matriarcado de Pindorama.
프로이트에 의해 등록된, 치장되고 억압적인 사회적 현실에 맞서는—컴플렉스와, 광기와, 매춘과 그리고 핀도라마의 모계장제 하 감옥도 없는 현실.


OSWALD DE ANDRADE
Em Piratininga
Ano 374 da Deglutição do Bispo Sardinha."
(Revista de Antropofagia, Ano 1, No. 1, maio de 1928.)
오스왈드 지 안드라지,
피라치닝가에서
주교 사르디냐*가 잡아먹힌 지 374년째
(식인종 저널, 1권 1호, 1928년 5월.)
(*바이아의 주교였던 사르디냐는 리스본으로 돌아가던 중 난파당해 인디언들에게 잡아 먹혔습니다.)


각주 참조: Leslie Bary, Latin American Literary Review, Vol. 19, No. 38 (Jul. - Dec.,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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