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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Oct 25. 2019

어릴 땐 몰랐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이야기

브라질 문화

누구나 때가 되면 헤어질 수 있는 것이 삶이란다. 혹시나 라임오렌지나무가 무슨 일을 당한다고 해도 아주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겠니?


브라질이 지구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 읽었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1968년 주제 마우루 지 바스콘셀루스(Jose Mauro de Vasconcelos)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배경 삼아 써 내려간 소설로, 전 세계 19개국에서 32개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으며, 브라질 내에서도 1970년부터 꾸준히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는 대중적인 문학 작품입니다.


학대받는 제제와 그에게 아버지가 되어준 뽀르뚜가


1920년대 히우 지 자네이루의 변두리 방구(Bangu)시를 배경으로, 여섯 살 난 주인공 제제(Zezé)는 실직한 아버지와 매일 공장에 나가는 어머니 아래에서 힘들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유년기를 보냅니다. 장난꾸러기이자 "작은 악마"로 불리며 가족들에게 항상 혼나고 얻어맞기만 하는 제제에게 집 앞의 라임오렌지나무는 가상의 친구가 되어줍니다. 제제의 장난의 대상이 되는 뽀르뚜가 아저씨도 처음에는 제제를 혼내다가 정이 들게 되고 둘은 아빠와 아들 같은 사이가 되지만, 뽀르뚜가는 어느 날 망가라치바 기차에 치여 세상을 떠나 버리고 라임오렌지 나무마저 잘려 버리면서 제제는 충격에 앓아눕게 됩니다. 소설은 제제가 훗날 자라서 뽀르뚜가에게 편지를 쓰는 시점에서 끝이 납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Bangu 시. 지금도 좋은 동네는 아닙니다.


유년기의 성장통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1인칭 시점에서 너무나 생생하게 풀어낸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제제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서는 제제의 가난한 가족과 그들이 사는 낙후된 동네에 대한 고발문학이기도 합니다. 어린이가 가지는 만화경 같은 시선을 빌려서 완곡하게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점은 한국문학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 포르투갈어로 읽어 본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굉장히 폭력적입니다. 말 한 번 잘못했다는 이유로 제제는 아버지에게 허리띠로 맞는가 하면, 누나와 형들은 이빨이 빠지도록 제제를 패기도 합니다. 뽀르뚜가와 수영을 갔을 때 제제의 벗은 몸은 구타로 인한 멍과 상처로 가득했고, 브라질에서 매 맞는 일이 흔했음에도 뽀르뚜가가 깜짝 놀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아마 브라질이 선진국이었다면 제제의 부모는 오래전에 친권을 박탈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유가 한때 각색했던 "제제"에 비난이 쏟아졌던 이유도 제제가 단순한 장난꾸러기가 아닌 가정폭력 피해자였기 때문입니다)


소설 중반에 제제의 집이 크리스마스를 맞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버지가 실직했기 때문에 당연히 선물은커녕 저녁밥도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전기요금까지 밀려 결국 집에 전기마저 끊어지게 됩니다. 실망한 제제는 가난한 아버지가 너무 싫다고 말해버리고, 이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나중에 제제가 외설적인 노래를 부르는 걸 본인을 무시한다고 오해하고서는 제제를 죽일 기세로 심하게 때립니다. 이 사건으로 제제는 마음속으로 아버지와의 연을 끊어 버립니다. 전기가 끊어진 깜깜한 집은 희망이 없는 제제 가족의 현실을 보여주고, 아버지의 폭력은 가난으로 인한 비참함을 더 고조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들에겐 먼 나라 이야기일 뿐입니다.


"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래야 실망도 안 하거든."


"뜻도 모르고 읊조린 대중가요 가사 하나 때문에 아들에게 가차 없이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의 모습은 국민과의 소통 대신 가혹한 검열과 탄압으로 일관했던 1960년대 국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달리 말해, 국가의 부재를 떠올리게 하는 중의적 표현인 셈이다"
(중남미연구, 73).


그런가 하면 폭력적인 아버지가 독재정권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제제가 심하게 맞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 대중가요라는 부분도 노래를 일일이 검열하던 시대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고발하는 또 다른 현실은 바로 브라질의 산업화에서 철저하게 밀려나 있는 일반 노동자들입니다. 제제가 살던 히우 외곽도시 방구(Bangu)는 1890년 기차역과 철도가 놓이면서 지금의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철도가 제제의 어머니가 일하는 "영국인의 방직공장"과 같은 일자리를 가져다준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제제에게 아버지 같던 뽀르뚜가의 죽음은 바로 망가라치바 기차에 의해서였습니다.


제제에게 악몽을 가져다준 망가라치바 기차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차에 산산조각 나는 뽀르뚜가의 차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비극으로 끝나게 만드는 이 사고는 어쩌면 열악한 인프라에 의해 발생한 인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중에서 뽀르뚜가의 차는 동네에서 가장 빠른 명차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차를 피하지 못했다는 것은, 건널목이나 기차의 브레이크 같은 시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추측을 하게 해 봅니다. 실제로 제제가 기차에 치여 죽고 싶다고 말했을 때, 뽀르뚜가는 그날 밤 마지막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야 늦게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만큼 건널목이나 역의 시설이 행인들에게도 위험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산업화의 상징인 기차가 사람을 죽이는 철덩어리가 되고,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제제의 친구였던 나무가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작가는 산업화의 과정에는 희생되고 그 결실은 맛보지 못하는 불쌍한 노동자들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90년대까지도, 한국은 브라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개발도상국의 문제들을 떠안고 있었습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은 한국인들이 소설에 그려지는 달동네, 아동학대, 실업과 가난을 모르지 않았기에 어쩌면 지금의 스테디셀러가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영미권에서는 폭력성 때문에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교육 목적으로 쓰지도 않고 유명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제제를 떠나보낼 날이 와야 하지 않을까요.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사랑하는 뽀르뚜가, 저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영원히 안녕!"

-우바뚜바(Ubatuba)에서,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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