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문화
한 국가의 상징과도 같은 지폐에 누구의 초상이 들어가느냐는 항상 열띤 논쟁거리가 됩니다. 그런데 브라질은 신권을 찍더라도 누구를 넣을지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색깔만 다르고 완전 똑같은 초상을 넣었으니까요.
지금의 헤알화는 1994년 제정된 것이고, 사실 예전에는 여느 나라와 동일하게 왕, 영웅, 위인 등을 새겨 넣곤 했습니다. 그럼 왜 지금은 추상적인 "공화국의 초상(Efigie da Republica)" 하나로 통일한 것일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화폐를 너무 자주 바꾸느라 기념할 사람이 바닥나서...
헤알화의 등장을 이해하려면 당시 브라질 상황을 봐야 합니다.
90년대 초반 브라질을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정치적 불안정과 잘못된 화폐정책으로 인한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나 보던 연 수백%, 수천%의 인플레이션은 브라질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가게들은 가격표를 아예 떼어버리고 색깔로 가격을 표시하기 시작했고 지폐를 가방에 가득 채워서 물건을 사러 갔더니 어제보다 가격이 더 올라서 못 사는 블랙코미디가 계속되었습니다. 이에 새로 출범한 문민정부는 1986년부터 1994년까지 세 번이나 화폐를 바꾸어 가면서 개혁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단순히 화폐에서 0을 몇 자리 떼고, 돈을 더 찍어서는 해결될 수 없었습니다.
1994년, 카르도주 재정부 장관은 헤알 플랜(Plano Real)을 통해 초강경책을 실행합니다. 강한 환율정책으로 달러와 1대 1을 맞추었고, 공무원수를 줄여가면서까지 공공부채를 낮춤으로써 정부의 재정 안정성을 높였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과거처럼 정부가 돈을 더 찍어서 부채를 메꾸는 악순환을 멈춘 것입니다. 헤알 플랜은 보란 듯이 성공했고, 카르도주 장관은 다음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심차게 신권을 찍으려고 보니 최근 몇 년 사이에 지폐를 너무 많이 바꿔서 일단 마땅한 인물이 없었고, 문맹률이 높은 브라질에서 복잡한 지폐는 헷갈릴 위험이 있었습니다. 또한 헤알 플랜의 성공을 위해서는 새 지폐 시리즈가 "한 묶음"이고 믿을 만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크기와 색깔만 다르게 하고, 헤알화는 동전까지 모두 공화국의 초상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사람 그림=구 화폐", "여신 그림=신 화폐" 라는 간단한 규칙만 알면 되었습니다.
이 여신은 자유의 여신상처럼 상징성이 있는 인물도 아니었기 때문에, 조사에 따르면 많은 브라질 사람들이 아직도 화폐에 새겨진 얼굴을 "카이사르" 혹은 "아담"으로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고 합니다. 정작 실사용자인 국민들이 화폐의 초상을 알아볼 수 없다면 이는 좋은 디자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여러 화폐단위가 난립하던 당시의 브라질에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