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포에라의 간략한 역사
19세기 중반 브라질을 여행하며 그림책을 엮었던 독일 출신 화가 루겐다스(Rugendas)는 브라질에 관한 귀중한 사료를 많이 남겼습니다. 그는 귀족뿐만 아니라 노예들에 대해서도 많은 그림을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카포에라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루겐다스는 이 그림에 "카포에라 놀이 혹은 전쟁의 춤" 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도 카포에라를 뭐라고 묘사해야 할 지 몰랐던 모양입니다. 놀이? 춤? 무술? 카포에라의 정체는 뭘까요?
'카포에라'라는 단어가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1770년대부터 "싸움" 혹은 "투쟁"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은 찾아볼 수 있습니다. Hermeto Lima의 책에 따르면 숲속으로 도망친 흑인 노예들이 쥬앙이라는 두목의 지휘하에 무술을 연마했으며, 이들은 무기가 없었기에 박치기나 발차기를 주로 사용했고 때로는 막대기나 칼을 쓰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부터 브라질 관료들은 추노들이 사용하는 무술이나 반란을 뭉뚱그려서 Capoeiragem, 즉 카포에라 짓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 결투장이 아닌 뒷골목, 용맹함이 아닌 약삭빠름... 그것이 카포에라의 시작이었습니다.
노예, 특히 추노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에 카포에라를 하는 것은 오랫동안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1820년부터 30년까지 히우 지 자네이루 시는 카포에라를 금지하는 조례를 10개 이상 통과시키기도 했고, 이를 어길 시에는 광장에서 채찍으로 처벌했습니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선포된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카포에라의 이미지는 주머니칼을 든 건달과 같았기에, 1890년 정립된 브라질 형법은 카포에라를 하는 자를 2-6개월 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못박기도 했습니다. (이 형법은 무려 1960년이 되어서야 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찰 체포 기록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됩니다. 1890년 카포에라를 하다가 잡혀들어간 사람들의 통계를 보면 흑인과 백인의 비율이 거의 동등하고 외국인도 일부 들어가 있습니다. 이미 브라질 사회에 카포에라가 인종을 가리지 않고 퍼져 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브라질의 뒷골목이 위험했거나 카포에라가 재미있었거나... 아마 현실은 둘 다였을 것 같습니다.
태권도에 국기원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올림픽 종목 채택이나 세계화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을 치고 받는 무술에서 스포츠가 되려면 공인된 기준이 있어야 하고 국가적 인정이 필요합니다. 카포에라 역시 브라질에서 꾸준히 스포츠화하려는 시도를 했기에 깡패짓의 오명을 벗고 브라질 공식 스포츠로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1907년 히우 지 자네이루에서는 "국민체조로서의 카포에라"라는 익명의 책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저자는 감방에 들어간 주정뱅이와 칼잡이들이나 하는 짓이 카포에라의 현실인 점이 개탄스럽다며 카포에라를 깡패들로부터 구출해내 국민체조(Ginastica Nacional)로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비교적 신생국가였고 여러 인종이 공존했던 브라질은 국민을 통합시켜줄 상징물을 간절히 원했고, 쌈바 같은 '우리 고유의 것'을 찾으려는 시도도 활발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역사가 깊은 카포에라가 눈에 들어오게 되었으나, 카포에라를 국가 차원에서 사용하려면 대대적인 이미지 세탁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1928년, "국민체조로서의 카포에라 규칙"이 Burlamaqui에 의해 처음 제창됩니다. 그는 카포에라 기술들을 공격, 방어, 카운터 등으로 세분화하고 권투에서 따온 링과 점수제를 도입했습니다. 전통 카포에라의 본질과는 많이 멀어져 있었지만 높으신 분들이 보기에는 이 유럽화된 모습이 매력적이었기에, 1941년 바르가스 대통령은 브라질 무술협회를 만들어 카포에라를 관리하게끔 지시합니다. 싸움의 기술이 아닌, 태권도나 복싱처럼 남녀노소 배울 수 있는 스포츠가 된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 바이아에서는 메스트리 빔바(Bimba)와 파스치냐(Pastinha)가 현대 카포에라의 기틀을 다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카포에라가 살아 숨쉬는 예술이 아닌 체조 동작처럼 전락한 데 안타까움을 느낀 빔바는 카포에라에 필수적인 노래와 호다(둥글게 둘러앉는 대련장), 악기 등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카포에라 수련생들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술담배를 자제하고 항상 단정한 매무새로 다닐 것, 학교나 직장을 다니는 생산적인 시민이 될 것, 그리고 전통문화로써의 카포에라 예절을 항상 존중하고 악행에 사용하지 말 것 등을 당부한 빔바의 도장은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바이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으며, 길거리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카포에라를 유도나 주짓수처럼 제식화하여 승단 시스템을 가진 정식 무술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빔바가 아니었더라면 카포에라는 그저 흥미로운 전통문화재 정도로 남았을 것이라고 한 역사가는 평하기도 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카포에라가 국민무술로 만들어지는 데는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카포에라의 스포츠화라 함은 눈속임과 교만, 약삭빠름을 덕목으로 치던 건달에게 이제는 공식석상에 올랐으니 단정한 도복을 입고 링 위에서 1:1로 신사적으로 싸우라고 지시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또한 각지에 흩어져서 카포에라를 연마하던 메스트리(Mestre, 사범)들을 한곳에 모아서 이제 교육 현장에서도 쓰고 세계화를 시켜야 하니 동작과 기준을 모두 통일하라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브라질은 독재정권 하인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도 여러 번 카포에라 심포지엄을 열어서 단일화와 규제를 시도했으나 메스트리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특히나 헤지오나우(Regional, 현재 대다수 카포에라 스타일)와 앙골라(Angola, 전통에 가깝고 비교적 느린 스타일) 둘 간의 차이점을 좁힐 수가 없었습니다. 룰라 정권이 개최한 2003년 회의 때는 500명이 넘는 메스트리들이 참가한 가운데 메스트리 Pinatti가 마이크를 뺏어서 "카포에라는 문화이지 스포츠가 아니다!" 라고 소리치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합니다.
카포에라가 점점 더 스포츠화되면 기존의 메스트리들에게는 기회도 더 생기고 유리할 것 같지만, 많은 메스트리들이 카포에라의 자율성이 사라지고 하나의 자격증으로 취급받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카포에라 교육에 관한 규제가 생기면 빈민가의 아이들이 카포에라를 접하고 그것으로 신분 상승을 꿈꾸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자에 대한 저항의 아이콘으로 출발한 카포에라가 정부에 의해 정의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얼핏 보면 통일성이 없고 도장이 많아 보이는 데는 카포에라가 그만큼 자유롭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카포에라 도장에 가면 초심자는 회피와 방어부터 배우지만, 위로 올라갈 수록 속임수(malicia), 양아치짓(malandragem) 같은 고급(?) 기술을 연마할 것을 주문받습니다. 카포에라 대련장 안에서는 훼이크로 맞은 꿀밤이 정면으로 맞은 발차기보다 더 아픈 법입니다. 설사 카포에라가 올림픽 종목이 된다 하더라도, 속임수에 점수를 매길 수는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전통이 살아 있는 한, 카포에라의 변칙성과 높은 자유도는 카포에라의 스포츠화에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루겐다스도 고민했듯이, 카포에라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현재진행형이니까요.
인용 논문:
Sergio Luiz de Souza Vieira, Capoeira – Origem e História (박사 논문)
Katya Wesolowski, Professionalizing Capoeira: The Politics of Play in Twenty-first-Century Braz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