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브라질 스타의 일생
옛날 할리우드 영화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카르멘 미란다를 어디선가 한 번씩 보았을 겁니다. 바나나와 과일이 잔뜩 든 모자를 쓰고, 현란한 장신구를 하고 과장된 몸짓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화려하지만 공허한 느낌이 듭니다. 영화 "치코와 리타"에서처럼, 뉴욕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끝은 너무도 초라했던 카르멘 미란다의 삶은 바나나 모자에 가려져 오랫동안 조명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미국 엔터테인먼트에 이용당한 순진한 브라질 여자였을까요? 우리가 모르는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이 있지는 않을까요?
카르멘 미란다는 1909년 포르투갈에서 태어나 어릴 때 히우 지 자네이루로 가족과 이민을 왔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저렴한 기숙사를 운영했고 어린 카르멘은 그곳에 묵고 가는 음악가들에게 노래를 배웠습니다. 1930년대 쌈바가 조금씩 인기를 끌 무렵, 카르멘은 라디오에 쌈바 가수로 데뷔했고 얼마 안 가 인기 가수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쌈바는 가난한 흑인들이나 듣는 음악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젊은 백인 여자 가수가 부르는 쌈바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1935년, 이미 그녀는 브라질에서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는 가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그녀를 가수로 남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1937년, 바르가스 대통령은 국회를 폐쇄하고, 헌법을 뜯어고쳐 "Estado Novo"라는 새 공화국을 출범시켰습니다. 브라질의 이 같은 독재화에 미국 루즈벨트 정권은 적잖이 놀랐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브라질과 계속 손을 잡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브라질이 추축국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브라질에는 상당수의 독일 이민자들이 살고 있었고 독일 또한 자원 때문에 브라질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자칫 뒷마당인 남미를 적으로 돌리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또한 루즈벨트가 밀고 있던 좋은 이웃 정책(Good Neighbor Policy)을 남미 최대 국가 브라질에서 성공시켜 좋은 본보기를 만들려는 점도 한몫했습니다. 바르가스는 바르가스대로, 미국과 친해서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국제무대에 올라서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두 나라의 대통령은 1939년과 1943년 두 번 만났고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절친이 되었습니다.
브라질 정권은 미국에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은 답례로 국가대표 가수, 카르멘 미란다를 선물로 보내기로 합니다. 바르가스 대통령이 대놓고 "외교부는 이제 카르멘 미란다를 더 육성시켜야 하겠군"이라고 농담할 정도로 그녀의 외교적 위치는 중요했습니다. 미국 측에서는 처음에 카르멘의 티켓만 사주었으나, 카르멘은 밴드와 함께가 아니라면 못 간다고 버텼습니다. 결국 브라질 정부가 밴드의 티켓을 부담해주었고, 그녀는 미국에 쌈바를 알리고 오겠다는 야심 찬 발표와 함께 1939년 미국행 상선 SS 우루과이호에 올랐습니다. (이 노선 역시 좋은 이웃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카르멘 미란다가 미국에서 참여한 대부분의 노래와 영화는 브라질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어중간한 "라틴"풍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초반에는) 미국에 진지하게 쌈바를 알릴 의지가 있었습니다. 탱고의 아버지 카를로스 가르델마저 뉴욕에서 반주자를 못 구해서 난감해하던 당시, 카르멘이 그녀의 밴드 Bando da Lua를 데려온 것은 신의 한 수였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밴드 멤버들이 아니었으면 나는 그저 쿠바나 멕시코 음악을 하는 라틴가수로 전락했을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카르멘은 덕분에 Tico tico no fuba, O que e que a Baiana tem 등 브라질 전통 쌈바를 미국 공영방송에서 알릴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미국 대중의 남미에 대한 인식은 매우 얕은 수준이었습니다. 카르멘의 매니저와 제작사는 브라질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카르멘이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해서 이국적인 음악과 영화에 출연해주기를 원할 뿐이었습니다. South American Way 같은 작품을 보면 남미는 국가에 상관없이 게으른 낙원 정도로 묘사됩니다. 카르멘은 That Night in Rio, The Gang's All Here 등을 통해서 계속 브라질 음악을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애썼지만 미국이 기억하는 카르멘의 이미지는 이미 바나나 모자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브라질에서도 그녀가 더 이상 어느 나라 음악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생활 1년을 마치고 1940년 카르멘은 큰 기대를 가지고 브라질 무대로 돌아왔지만, 그녀가 영어로 부른 첫 곡이 끝나자 관중들은 박수 대신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 날 콘서트는 중도에 끝나버렸고 이 사건은 두고두고 카르멘에게 큰 상처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Disseram que eu voltei Americanizada(내가 미국물을 먹었다고들 하네)라는 쌈바를 통해서 해명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이미 대중의 마음이 돌아선 뒤였습니다.
카르멘을 양국의 대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권력자들의 역할 그리고 시대적 상황이 컸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브라질이 친할 수밖에 없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지만, 위기가 끝나자 “좋은 이웃"의 필요성 또한 줄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종전 직전에 숨을 거두었고, 바르가스 대통령의 권세 역시 기울고 있었습니다. 믿었던 장군들에게마저 퇴진을 강요받은 그는 끝을 직감한 듯, 1954년 대통령궁에서 잠옷을 입은 채 가슴에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한 세대를 풍미했던 바르가스의 제2공화국은 그렇게 쓸쓸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한때 미국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았던 카르멘 미란다도 전쟁이 끝나자 3류 배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화려한 의상을 위해 아낌없이 비싼 칼라 필름을 썼던 스튜디오들은 이제 값싼 흑백 필름으로 그녀를 찍었습니다. 1944년 그녀는 치키타(Chiquita) 바나나 회사와 공식 모델 계약을 맺었고 지금까지도 바나나 마스코트로 쓰이고 있습니다. 카르멘은 "나는 클라크 게이블과 영화를 찍어보고 싶지만/ 프로듀서가 안된대요/ 나는 바나나로 돈을 벌어야 하니까" 라며 본인의 처량한 신세를 노래를 통해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1947년 카르멘은 미국 텍사스 출신의 투자자와 결혼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별로 행복한 결혼생활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영혼 없는 미국 생활에 그녀의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1955년, 카르멘 미란다는 Jimmy Durante Show에 출연해서 Delicado라는 브라질 노래를 한 곡 불렀습니다.
델리카두를 들을 때면
나는 옆구리에 차가움을 느끼네
심장 한편이 아파오네
왜냐하면 델리카두가
내 과거와 내 고향을 떠올리게 하니까...
이 곡은 카르멘이 부른 마지막 노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방송 도중 쓰러졌고, 힘들게 촬영은 마무리했으나 그날 밤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카르멘의 운구가 비행기에 실려 히우에 도착하자, 6만 명이 넘는 관중들이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거리로 나왔습니다. 행렬은 카르멘이 생전에 불렀던 노래 "안녕, 바투카다"를 합창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으면 마치 카니발 같을 거야"라고 말하고 다녔던 카르멘의 예언은 그렇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벌써 동이 터오고 있어
나는 저 멀리 울며 떠나
내 웃음 짓는 심장과 함께
온 세상이 바투카다의 진가를
알아보게 하겠어
브라질 가수 카에타누 벨로주는 카르멘 미란다에 대해 "자라면서 그녀를 본 모든 브라질 사람들은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정의 내리기 어려운 입체적인 인물입니다. 카르멘의 성공은 분명 브라질과 남미에 큰 자랑거리였지만, 브라질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기에는 미국의 수용도가 너무나 낮았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브라질의 국력과 외교력이 미국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국제무대에는 실력이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1950년대 김시스터즈가 라스베가스에 K팝 열풍을 촉발시키지 못한 것처럼, 1930년대 카르멘 미란다도 브로드웨이에 쌈바 열풍을 불러올 수 없었습니다. 브라질은 커피랑 바나나 파는 나라 정도로 인식되었으니까요.
카르멘은 왜 클리셰로 전락해가는 사실을 알고도 미국에 계속 있으려 했을까요? 돈과 명예도 한몫했겠지만, 그녀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아마 1940년 브라질에서 받은 야유와 상처 때문에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추측을 하게 만듭니다. 그녀는 1954년 요양을 위해서 잠시 브라질에 들렀을 때를 제외하고는 1940년부터 죽기 전까지 브라질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캐리커처로 소비되고 브라질에서는 야유를 받으며 그 어느 편에도 붙지 못하는 상황은 카르멘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 최고의 출연료도 가짜 삶을 풍족하게 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가 죽은 지 50주년인 2005년, 히우 지 자네이루 시는 카르멘 미란다 특별전을 개최했습니다. 전시의 초점은 브로드웨이 대신 그녀가 브라질에서 활동했던 기록들에 맞춰졌습니다. 가난한 직공에서 300곡이 넘는 녹음을 한 라디오 스타가 되기까지, 그녀의 삶은 브라질 음악을 빼놓고 논할 수 없었습니다.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바이아 여인들의 전통의상을 무대에 올려 유행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미국에 가지 않았더라면 국제적 스타는 되지 못했겠지만, 브라질에서 꽤 행복한 삶을 누리고 존경받는 쌈바 가수로 눈을 감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카르멘은 시대를 너무 앞서갔고, 결국 미국과 브라질 모두에게 버림받았지만, 그녀만큼 브라질 음악과 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린 스타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입니다.
출처:
James Mandrell, Carmen Miranda Betwixt and Between, Or, Neither Here Nor There
Paiva Diniz, O Cicerone Luso-Brasileira na America
Martha Gil-Montero, Brazilian Bombshell: The Biography of Carmen Miran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