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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Aug 01. 2020

브라질의 로빈후드, 람피엉

의적 혹은 도적

0.  들어가면서


비록 그 황금기는 지났을지 몰라도, 황야의 무법지대를 배경으로 선과 악의 운명의 대결이 펼쳐지는 서부극은 고전영화를 논할 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장르입니다. 무명의 방랑자를 연기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서부극은 최근까지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나 <레드 데드 리뎀션> 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팬들의 향수를 자극합니다. 넓게는 슈퍼히어로 영화나, 스타워즈 같은 SF영화도 서부극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면 평화를 찾고 싶어 하지"


더 이상 서부라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우리는 어째서 이 낡은 장르에 계속해서 끌릴까요? 그 이유는 아마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에 위치한 미개척지가 만들어내는 스릴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배경이 미국이든, 호주든, 브라질이든 간에, 보안관이나 지역 유지에 기댈 수 없었던 힘없고 가난한 일반 사람들은 명예와 신뢰에 대신 목숨을 걸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한번 준 믿음은 피보다 진해야 했고 그것을 어기면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이런 서부극 특유의 긴장감은 단순히 영화가 상상해 낸 것이 아닌, 실제 서부에서의 척박한 삶에 어느 정도 기반하고 있기에 우리에게 더 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 메마른 삶들


Vidas Secas는 1963년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브라질판 <분노의 포도>라 불리기도 하는 <메마른 삶들(Vidas Secas)>은 1938년 발표된 후 브라질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알라고아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작가 Graciliano Ramos는 세르타웅(sertão)이라 불리는 북동부의 척박한 땅에 정착해 고생하는 가족의 삶을 특유의 건조한 문체로 그려냈는데, 막상 읽어 보면 소설이 진행되는 시점에서 토지는 메말라 있지 않습니다. 혹독한 건기가 끝나고 모두가 기다리던 우기가 오는 것을 본 주인공 가족은 "세계의 주인"이 된 것처럼 행복해하지만, 결국 그들의 삶을 망가뜨린 것은 흉년이나 건기가 아닌 대지주들의 횡포였습니다.


땅, 그의 보스, 경찰, 공무원... 모두가 그를 적대했다.


"Coronel" 즉 대령이라고 불리던 대지주들은 건기에 취약한 농부들을 마음대로 휘둘렀으며,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떠나거나 도적이 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20년 간 브라질 북동부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도적왕 람피엉의 이야기는 이 불행한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람피엉이 태어난 마을. 여전히 조용한 시골입니다.


비굴리누 페헤이라 다 실바(Virgulino Ferreira da Silva)는 1897년 페르낭부쿠의 작은 농장에서 9형제 중 셋째 아이로 태어나 목축과 농장일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여느 동네 아이들처럼 농부나 카우보이로 조용히 살다가 갔으면 좋았겠지만 세르타웅의 척박한 현실은 비굴리누 가족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토지 분쟁 등으로 다른 집안들과 자주 충돌했고 머지않아 경찰과도 척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비굴리누가 스물네 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게 됩니다. 비굴리누와 그의 형제 둘은 아버지의 복수를 맹세하고 도적단에 합류했습니다.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비굴리누는 첫 전투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그의 레버 액션 라이플이 무섭게 불을 뿜는 것을 본 동료가 "마치 빛나는 램프 같다"라고 농담한 것이 큰 램프를 의미하는 예명 "람피엉"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촌동네 카우보이 비굴리누가 아닌 공포의 무법자 람피엉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2. 캡틴 람피엉


수학선생님같이 생겼지만 브라질 최고의 강도였습니다.


도적단에 합류한 지 불과 3년 만에 람피엉은 보스의 자리에 올랐고, 벼르던 아버지의 복수에도 성공했습니다. 1922년에는 Agua Branca의 대저택을 털어 금은보화와 무기를 챙기기도 했습니다. 람피엉의 무용담이 점차 북동부를 넘어 전국으로 퍼지면서, 그의 도적단은 거의 20년간 언론의 단골 소재가 되었습니다. 브라질 대중들에게는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람피엉이 의적 로빈후드에 가깝게 묘사되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대지주들이 워낙 악독했고 공권력이 부재하거나 부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주에게 털리고 부패한 경찰에게 또 털리던 가난한 농부들에게는 차라리 도적단이 정의로워 보였을 것입니다.


대중의 인식과는 다르게, 람피엉의 도적질 그 자체는 다른 도적들이 했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항상 부자들만 골라서 털었던 것도 아니었고, 어떨 때는 지주들의 보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살인, 강간과 같은 잔인한 범죄도 저지르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캡틴 람피엉이 보여준 카리스마와, 비록 무법자였지만 목사님과 친했고 평생 한 여자와 결혼해서 지내는 등 당시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친근하게 여겼습니다. 심지어 현상수배범인 주제에 도시에 버젓이 걸어 들어가서 주민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파티를 열고, 인터뷰 요청을 받고서는 다음 날 신문에 기사가 잘 나왔는지 체크하기까지 했습니다. 람피엉과 동료들이 직접 디자인하고 재봉틀을 돌려 만든 가죽옷으로 멋스럽게 차려입은 그의 도적단은 가는 곳마다 아이돌과 같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동네 아이들도 도적단의 애창곡 "Mulher Rendeira"를 부르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3. 검은 천사, 하얀 악마


도적왕 람피엉의 이야기에서 가장 독특한 점 중 하나는 그의 남다른 신앙심일 것입니다. 특히 람피엉과 시세로 목사(Padre Cicero)의 이야기는 유명한데, 1926년 람피엉의 도적단이 Juazeiro를 향해 이동하자 겁에 질린 도시 사람들은 마을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던 시세로 목사에게 람피엉을 만나줄 것을 요청했고, 도시에 도착한 람피엉은 시세로 목사를 존경으로 맞아주고 사람을 해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몰랐지만, 기록에 따르면 시세로 목사가 밤중에 몰래 공무원을 시켜 람피엉의 도적단을 지역 경찰(!)으로 임명하는 문서를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반란군을 소탕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유니폼에 최신식 마우저 소총까지 보급받은 도적단은 하루아침에 정의의 사도가 되어 도시를 떠났고, 시세로 목사의 꾀로 인해 지역 주민들은 피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람피엉과 시세로 목사


역사가 Billy Chandler는 람피엉이 도적단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 했으며 나름대로 경찰직에 자부심을 가졌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순탄하게 풀릴 줄 알았던 람피엉 제 2의 커리어는 페르낭부쿠 경찰이 임명장을 기각하면서 다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람피엉은 시세로 목사를 다시 보고 싶어 했지만, 당시 시세로 목사는 선거에 후보로 참여하고 있던 터라 도적과 인연을 맺을 수 없었습니다. 믿었던 목사에게 거절당한 그는 다시 도적의 삶으로 회귀하고 맙니다.




4. 방랑자의 삶


무법자의 상징, 현상수배 포스터


비록 시세로 목사와의 인연은 끝났지만, 람피엉은 그 뒤로도 의적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 예로, 바이아의 마을을 습격한 람피엉의 도적단은 부자들을 모두 털고, 마을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고 잔치를 열었으며, 권력을 남용한 경찰들을 처형했습니다. 람피엉은 특히 약속을 잘 지켰다고 하는데, 그가 약탈하지 말라고 지시한 마을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주민들에게 무언가를 빌리면 꼭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람피엉에게 당한 사람들은 치를 떨었지만 이런 매너 있는 모습이 입에서 입으로 퍼지면서 로빈후드 전설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습니다.


1930년 람피엉은 자주 들르던 한 시골 마을에서 만난 이쁜이 마리아(Maria Bonita)라는 여자를 사귀고 결혼까지 했습니다. 그의 다른 동료들도 여자친구나 아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여성들은 전투에 참전하진 않았지만 요리, 수선 같은 일을 도왔고, 아기를 낳게 되면 대부분 친구 집이나 고아원에 맡겼다고 합니다. 역사가 Chandler는 여성 멤버들이 도적단의 잔인성을 그나마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고 평합니다. 아내 마리아의 부탁으로 람피엉으로부터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있었고, 람피엉을 비롯한 대부분의 도적단은 방랑 생활이 10년 이상 길어지면서 강도짓 대신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이제는 경찰들 뿐 아니라 volantes라고 불리는 자경단도 람피엉을 쫒고 있었고, 그에게는 늘 독살, 배신, 기습과 같은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람피엉은 총 9번의 총상을 입었고 한쪽 눈을 실명했으며 다리를 절 정도의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약도 없는 세르타웅에서 풀을 캐다가 지혈을 하고 약초를 조합해 먹는 등 뛰어난 생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전투에 있어서도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는데, 주변 지리에 대한 이해와 각지에 깔아놓은 스파이들을 통해 경찰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덕분에 전투에 유리한 조건과 장소를 앞서서 정할 수 있었습니다. 게릴라전의 정석대로 불리한 싸움은 절대 걸지 않았고 열세에 몰리면 후퇴했습니다. 도망갈 때도 자갈밭을 이용한다던지 신발을 거꾸로 신는 식으로 흔적을 지웠기 때문에 경찰들의 눈에는 거의 순간이동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홍길동처럼 도시와 마을을 넘나들며 죽음을 비켜가는 그를 모두가 경외와 두려움을 가지고 바라보았습니다.




5. 도적왕의 몰락


여기까지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한 의문이 들 것입니다. "대체 정부는 10년이 넘게 무얼 하고 있었나?" 1920-30년대의 페르낭부쿠와 바이아의 개척지는 사실상 도적들이 활보하는 무법지대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런 막장이 벌어진 데는 람피엉의 뛰어난 게릴라 전술도 한몫했지만 지방 경찰 조직의 무능도 컸습니다. 상부는 돈을 빼돌렸고 제복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는가 하면 월급까지 밀리는 상황에서 당대 최고의 도적왕을 잡겠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정치인들도 이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고, 1934년 바르가스 대통령 시절 헌법을 새로 쓰면서 도적 소탕을 넣자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이슈로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범죄와의 전쟁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시작됩니다.


바르가스 대통령의 임기는 1938년 끝났어야 했지만, 1937년 11월 그는 갑자기 공산주의자들의 국가 전복 계획이 발각되었다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해 버렸습니다. Estado Novo('새나라')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바르가스 정권은 브라질을 농경 사회에서 탈피시켜 공업화, 현대화된 중앙 집권적 국가로 발전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정부와 법을 우롱하는 북동부의 도적들은 반드시 척결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같은 해 람피엉을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버젓이 상영되고 있다는 소식이 바르가스 대통령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늘 대외 이미지에 관심이 많았던 람피엉은 전속 사진사 Benjamin Abraão를 시켜 사진과 영상을 남기도록 했는데 이것이 결국 각하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당장 람피엉의 머리통을 가져올 것을 주지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문제의 도적단 사진들. 일부만이 검열을 살아남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브라질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람피엉의 몰락은 너무도 허무하게 다가왔습니다. 1938년 6월 28일 새벽, 배신자를 통해 도적단의 위치를 알아낸 바이아 경찰은 70명의 병사들과 호치키스 중기관총을 끌고 세르지피 주의 Angicos 농장을 기습했습니다. 20분간의 무자비한 십자포화 끝에 람피엉과 아내 마리아를 비롯한 11명은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고 나머지는 목숨만 건져 도망갔습니다. 압도적 승전에 도취된 경찰들은 도적들의 소지품을 모두 털고, 시체에서 목을 자른 후 소금에 절여 귀환했습니다. 도적들의 머리는 본보기로 곳곳마다 효시된 후 의학대학교에서 골상학자들의 연구 자료로 쓰였습니다. 골상학에 따르면 잔악무도한 범죄자라면 일반인에 비해 특징적인 두개골을 가져야 했으나 별다른 특징은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람피엉이 쓰러진 날 도망갔던 나머지 멤버들도 머지않아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지주와 카우보이, 도적으로 대표되던 북동부의 격동기는 그렇게 1940년 막을 내렸습니다.


람피엉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1면


람피엉의 머리는 그 뒤로도 계속 바이아 박물관에서 전시되다가, 유족들의 요청으로 1969년에서야 땅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중세도 아니고 20세기에 죄인의 머리를 효시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어찌보면 그만큼 람피엉이 대중들에게 초자연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잔인하게나마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바르가스 대통령은 람피엉이 찍은 사진과 영상도 파기하게 시켰지만, 도적왕의 전설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았습니다.


6. 람피엉의 유산


람피엉 이야기는 장르를 막론하고, 각색부터 2차 창작까지 북동부 문화 전반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북동부 사람들이 람피엉에 대해 남긴 시나 소설, 노래를 읽어보면 왜 이 잔인한 범죄자가 선망의 대상이 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바로 람피엉이 선인지 악인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북동부에 유행했던 단편 <A Chegada de Lampião no Inferno>은 람피엉이 악마들과 싸우고 지옥을 터는 코믹한 내용인데 여기서 사탄은 람피엉이 생전에 털었던 대지주처럼, 부하들과 사무실을 가진 보스처럼 묘사됩니다. 람피엉에 패배한 사탄은 결국 람피엉을 천국도 지옥도 아닌 세르타웅으로 다시 돌려보냅니다.


람피엉과 마리아 목판화


그런가 하면 람피엉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한 예로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1969년 <의적의 역사>에서 람피엉과 같이 농민계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도적들은 "사회적 도적(social bandit)"으로 따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평했으며, 단순 약탈이 아닌 일종의 시위나 반란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도적 개인보다 도적을 만들어낸 사회가 더 문제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Luiz Gonzaga의 노래 Lampião Falou는 "도적질은 계속된다네, 넥타이와 수트를 입고서/ 가죽모자도 총도 없지만/ 더 많은 사람을 잡는다네" 라며 진짜 도적은 따로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만원을 털면 도적이지만 수백명의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체납하고 초과수당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사장님은 몇백만 원을 털지 않았냐고 람피엉을 빌어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Lampiao Falou - Luiz Gonzaga


오늘날까지도 람피엉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채 학계와 문단, 영화계에서 재조명되고 생산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갱단에 합류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강도가 된 람피엉은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복잡한 인물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도적질은 1940년 종결되었지만, 바르가스 대통령은 북동부 개발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의 대통령직이 독재라는 오명을 남기고 1954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 지금까지도 척박한 세르타웅에 속하는 Alagoas, Pernambuco, Paraiba 등 북동부 주들은 브라질에서 가장 낙후되고, 가난하며 위험한 지역입니다. 과연 세르타웅은 영원히 저주받은 땅으로 남을까요? 아니면 인간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




람피엉의 패션 감각은 장 폴 고티에 2010 S/S 컬렉션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The Bandit King - Billy Jaynes Chandler

Os Cangaceiros - Luiz Bernardo Pericá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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