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아이유
사실 보사노바와 보사노바식 편곡이 한국에서 대중적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지는 훨씬 오래 전의 일이었다. 예전에 유행하던 <나는 가수다>에서 보사노바 편곡을 한 가수가 꼴찌로 떨어졌던 모습이나, 리사 오노의 공연을 보고 오신 부모님이 "노래는 좋은데 너무 매가리 없이 들린다"는 짧지만 강렬한 한줄평을 남기셨던 기억도 나고, 결정적으로 어제 우연히 아이유의 '편지할게요' 보사노바 버전을 다시 듣다가 이 생각의 뿌리를 다시 되짚어가게 되었다. '왜 보사노바는 인기가 없는가?' 앞의 질문에 한동안 나는 이렇게 답했었다.
'한국인들은 보컬의 테크닉이 잘 드러나고 기승전결이 뚜렷한 곡을 선호하는데,
보사노바는 강한 한방이 없어서.'
하지만 브라질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단순히 두 나라의 노래 취향이 다르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브라질 사람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노래를 좋아하고, 뛰어난 가창력에 대한 열광은 세계 어느 나라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노래의 장르가 아닌 다른 차이점이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아이유의 '편지할게요'는 확실히 원곡과 느낌이 다르다. 나는 이 버전이 어쿠스틱 라이브라는 컨셉에 잘 어울리는 보사노바 편곡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스크롤을 아래로 내려보니 원곡을 망쳐놨다고 욕하는 사람과, 좋기만 한데 웬 지적질이냐는 부류 둘이 싸우고 있었다. 놀란 마음을 뒤로 하고 박정현의 원곡을 듣고 나니 비난한 사람들도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이, 브릿지를 지나 후렴구의 클라이막스를 향해 상승하는 긴장감이 보사노바 편곡으로 인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원곡을 기대하고 들어온 사람들은 팝의 여왕 머라이어 캐리의 곡을 스무스 재즈로 바꿔버린 듯한 위화감에 분노의 댓글을 남겼던 것 같다.
아이유의 '편지할게요'를 둘러싼 논란의 일부는 음악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팝이나 가요를 보사노바 풍으로 해석했을 때 밋밋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보사노바가 기본적으로 쌈바에서 악센트를 최대한 빼 나간 음악이기 때문이다. (쌈바와 보사노바의 차이 비교는 https://brunch.co.kr/@brazilclub/68 를 참조)
현대의 보컬들은 대체로 R&B나 팝처럼 2, 4박에 강세가 들어간 리듬을 위주로 연습할 것이고, 쌈바의 경우 1, 3박에 큰북(surdo)이 쿵 하고 떨어져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명확하게 알려 준다. 반면 보사노바에서는 큰북 대신 베이스(혹은 기타)가 이를 대신하기 때문에 신나고 고양된 느낌보다는 구름처럼 이리저리 떠가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둥-탁 하는 강세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 보컬에도 힘이 덜 실릴 수밖에 없고, 이는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하는 오디션 프로에서의 광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만약 반대로 보사노바에 힘을 싣고 싶으면? 쌈바 쪽으로 더 가까이 편곡하면 된다. 윤상의 '이사'처럼 보사노바로 시작해서 쌈바로 끝내는 방법도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브라질 사람들도 강단이 있는 신나는 음악을 선호했다는 점이다. 최초의 보사노바 음반이라 일컬어지는 Cancao de Amor Demais(1958)의 보컬로 참여했던 Elizeth Cardoso는 원래 쌈바 가수였기 때문에 본인의 트레이드마크이던 굵은 목소리와 비브라토를 사용했고, 코러스 보컬과 관현악기도 동원되어 절제미보다는 풍부한 음색을 추구한 것을 볼 수 있다. (아마 브라질 사람에게 이 음반을 분류하라고 하면 쌈바나 쌈바-깐써웅 쪽에 넣을 것 같다) 이 음반 외에도 '카니발의 아침'으로 유명한 Orfeu Negro(1959) 의 곡들을 들어 보면 조빔과 비니시우스가 작곡한 곡이지만 보컬은 전통 쌈바에 가까운 과도기적인 느낌을 준다.
이렇게 보컬과 반주가 따로 노는 음반들이 여럿 나온 데는 당시 브라질 사람들도 '매가리 없는' 노래를 선호하기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보사노바의 창시자들인 조빔과 질베르투는 쌈바에 물을 탄 것 같다는 호된 비판에 직면했고 한 레코드사에서는 감기 걸린 사람에게 녹음을 시켰냐면서 LP판을 집어던지는 사태까지 발생할 정도로 평가가 엉망이었다. 이에 시달린 조빔이 작곡한 Desafinado(음치)의 가사를 보면 위에서 설명한 악센트의 부재를 잘 설명하고 있다. 자신들의 음악에도 쌈바의 심장이 뛰고 있지만, 들릴 듯 말 듯 조용하게 뛰고 있다는 해명이다.
Que no peito dos desafinados
No fundo do peito bate calado...
음치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도
심장이 조용하게 뛰고 있다는 걸...
여기까지만 보면 브라질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우리는 보사노바가 나올 당시 브라질 사람들도 강약, 기승전결의 부재로 인한 실망감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고, 쥬앙 질베르투와 같은 보사노바 가수들이 쌈바 곡을 '망쳐놓는' 데 반발했던 작곡가, 라디오 DJ들이 있었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브라질에서는 되고 한국에서는 안 되는 이유는 뭘까? 나는 '청중의 감상 태도'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려고 한다. 브라질의 청중은 트로트와 닮아 있다.
나는 트로트를 듣고 자란 세대는 아니지만, 트로트에는 가요엔 없는 플러스 알파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트로트 거장의 디너쇼를 보면 노래를 부르다가 인생 얘기도 하다가 백댄서들도 나오고, 장르도 발라드에서 락까지 거의 종합선물세트가 따로 없다. 지금 세대가 보면 공연을 들으러 가서 저녁을 먹는다는 자체도 좀 이상하게 보일 것 같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공연장이란 조용히 예술을 향유하러 가는 공간이지 손뼉 치고 떠들고 밥 먹는 곳이 아니라고 배웠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꽤 근대의 생각이다. 음악의 가장 전통적인 목적 중 하나는 관혼상제를 포함한 행사의 흥을 돋궈주는 일이었고 당연히 거기에 식사도 포함되었다. 현대의 우리가 트로트를 즐기는 방식은 무대가 없거나 낮았던 전통문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와타나베 히로시는 <청중의 탄생>에서 전통적인 수평적, 참여적 청중이 근대에 들어서 수직적, 집중적 청취를 강요받는 수동적 청중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그렸는데, 이를 한국에 대입해 보면 <전국노래자랑>은 전자이고 <복면가왕>은 후자라고 할 수 있다. 한쪽은 흥과 교감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다른 한쪽은 가창력과 기교에 올인한 모습이다. 이 둘은 대척점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상호 보완적이기도 하다. 가창력이 너무 떨어지면 이입하기 힘들고, 마찬가지로 청중과의 호흡에 서툴고 인간미가 없는 가수는 성공하기 어렵다.
브라질 대중들이 음악을 즐기는 방식은 경험상 트로트 쪽에 치우쳐 있다. (히우의 쌈바 클럽은 소문난 맛집이기도 하다) 잔잔한 노래에도 민폐다 싶을 정도로 떼창을 하기도 하고, 아예 가수가 마이크를 관객석 쪽으로 돌리고 노래방을 만들어 주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브라질 사람들은 공연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한다. 노예들과 뱃사람들의 메기고 받는 노동요에서 출발한 쌈바의 흔적이다. 그에 비하면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노래를 평균 이상으로 잘해야만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때문에 공연에서 보컬이 아닌 다른 밴드 멤버가 노래를 하면 재미있다거나 귀엽다고 생각한다.
반면 브라질 사람들은 노래를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을 더 이상하게 생각한다. 쌈바나 포호 같은 브라질 전통 음악을 들어보면 가창력보다는 전달력, 무대매너, 카리스마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브라질 청중의 취향 덕분에, 노래 실력이 결코 뛰어나다고 봐줄 수 없는 조빔과 비니시우스가 기회를 얻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이파네마의 소녀' 작사가인 비니시우스는 본래 직업이 음악가도 아니었지만, 유창한 5개 국어로 콘서트마다 입담을 늘어놓아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공연 실황을 보면 술을 그렇게 좋아했던 비니시우스답게 위스키 한잔 들고 뒷뜰 잔치처럼 자유롭게 떠들고 있는데, 아마 한국이었다면 보컬도 아닌 작사가가 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하고 있냐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을 것 같다.
행복이란 기준점을 어디에 설정하느냐의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는 음악에 무얼 기대하냐에 따라서 180도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비니시우스의 공연에 음악만을 감상하러 온 청중에게는 돈이 아까웠을 수도 있고, 종합적인 경험을 기대한 사람들은 나름 재미있는 쇼를 보고 갔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작곡가나 작사가가 등장해서 노래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윤상의 작사가 박창학, '태양계' '서른 즈음에' 작곡가 강승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수는 아니지만, 노래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들을 수 있고 깊은 의미가 있는 공연이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보사노바가 인기가 없는 문제는 브라질 음악에서의 노래에 대한 중요도가 낮아서라기보다는, 한국 청중들의 감상과 평가 능력이 매우 예리한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평소 즐겨 듣던 가요에 비해 기교나 심금을 울리는 감상 포인트가 부족한 잔잔한 음악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데다, 분위기나 멘트처럼 음악 외적인 요소가 만족도에 기여할 수 있는 비중이 적다면, 아마 보사노바 뿐 아니라 대부분의 저에너지 음악에 후한 평을 주기란 어려울 것이다.
박학기나 유재하, 쎄시봉 같이 흘러간 가요를 듣다 보면 한국도 항상 지금과 같지는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다만 대중음악의 산업화에 이어 K팝이 세계적인 트렌드로 부상하면서, 잔잔한 감동보다는 스펙타클한 한방에 치중한 음악이 자연스레 주류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무엇이 먼저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과정에서 청중의 선호도도 참여적 흥이 아닌, 감상적 고양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작품을 조용히 감상하는 것이 예술이며,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엔터테인먼트라는 계급적 사고도 가세하게 된다. 덕분에 현대 한국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기죽지 않을 퀄리티의 가수들, 실용음악과 학생들, 유투버들을 지니게 되었지만, 음악 감상에 있어서의 유연함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식당을 요리만 가지고 평가하지 않지만, <복면가왕>을 보면 가수는 노래만 가지고 평가해도 된다는 듯하다. 음악의 오디션화가 계속될수록, 우리는 창법의 다양성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나 시대, 장르의 음악을 편견 없이 감상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불후의 명곡> 세대인 나만 해도 동물원이 부르는 '혜화동', 김광석이 부르는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 원곡이 일견 밋밋하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한때 전국의 학생들을 노래방으로 향하게 만들었던 SG워너비와 더크로스의 시대는 가고 홍대의 잔잔한 인디 가수들이 조명받기도 했지만, 유행과는 무관하게 우리의 감상법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보사노바를 비롯한 많은 '매가리 없는' 음악들은 한국에서 잠깐의 재조명이나 엘리베이터 뮤직으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