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던 삶이었다."
푹 자고 일어났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매미소리가 들려온다. 14층 우리집, 자그마한 내 방, 천정의 정방형 전등. 새삼 낯설지만 편안하다. 어렴풋이 깜깜한 새벽에 들려오던 닭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지난 이주간 매일같이 아침이 오고 있음을 알리던 기분 좋은 소리다. 도암에서의 이주는 어땠는가.
서울에서의 하루는 언제나 계획을 세우고 시작했다. 물론 계획대로 흘러가는 날은 거의 없었다. 때로는 그래서 더 좋은 순간도 있었지만 마음 불편한 순간들이 많았다. 도암으로 떠나기 전 아주 다른 환경인 만큼 이전과는 다른 생활이 펼쳐지기를 막연히 기대했다. 이주라는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동안 그곳에서의 나는 어떨지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그저 똑같을까봐 내심 두려웠고 긴장되었다. 변화를 기대하는 만큼 기존의 것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나는 또다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바리바리 챙긴 커다란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는데, 가방의 무게만큼이나 마음도 어딘가 조금 무거웠다. 한참을 강진으로 향하던 중 천안의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버스가 멈췄다.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와 곳곳의 침수 소식이 끊이질 않았던 날이었고, 우리가 가던 길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십분, 사십분, 한시간, 두시간… 시간이 흐르면서 그날의 모든 일정이 물거품이 되었고, 당장 무사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지조차 불확실해졌다. 그 순간, 모두가 무사하게 해달라는 기도와 함께 이주 동안은 어떤 계획도 미리 세우지 않겠다고, 매 순간을 그 때의 나에게 맡기겠다고 다짐했다. 조용했지만 완고한 다짐이었다.
다행히도 비는 점점 잦아들었고 무사히 강진에 도착했다. 그렇게 시작된 도암에서의 이주는 너무나 풍성했다. 하루 동안에도 내 감정과 욕구, 생각은 수도 없이 바뀌었다. 나만 해도 이러니 당연하게도 나를 둘러싼 세상은 더 예측하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가령 러닝 중에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고 빗방울이 떨어진다거나, 등산 중 깎아지르는 절벽 앞에 그곳을 올라가라는 듯한 밧줄만 덩그러니 놓여있다거나, 식사 도중에 또다른 식사에 초대받는다거나, 잠깐 문을 연 순간 예쁜 석양을 마주한다거나,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별이 무수히 박힌 하늘에 시선이 닿는… 계획이 가득 찬 나였다면 예기치 못한 이 순간들을 담을 자리가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이주간 나는 이 모든 순간들을 충분히 누렸다. 순간순간에 능동적으로 반응했다. 어떠한 긴장이나 두려움 없이 오히려 기대에 가득 찬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하루의 소용돌이 속에서 감사함을 느끼고, 아무런 고민을 품지 않은 채 하루를 끝냈다. 하루의 끝에서 그 날을 돌아보면 생각보다 많은 일을 했고 많은 것을 느꼈다. 내가 바라던 삶이었다.
무계획의 힘이었을까. 그것만은 아닐 거다. 순간의 재빠른 계획들, 그것을 능동적으로 가능하게 한 넉넉한 마음과 건강한 몸, 그리고 매순간 찬란해서 끊임없이 나를 이끄는 동적인 자연. 이 모든 것이 한데 모여 내게 소중하고 멋진 이주를 선물하지 않았을까. 이를 가슴 속에 새기고 감사한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무계획으로써 스스로에게 무한한 하루를 선물하고, 주체적으로 하루를 누리는 원동력이 될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꾸고, 그 속에서 주변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도록 언제나 애정어린 시선을 갖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