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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름 Aug 16. 2024

반전매력

건강검진을 하러 모처럼 광화문에 놀러 온 김에 맛있는 점심과 더 맛있는 커피, 더해서 최고로 맛있는 디저트까지 먹고 귀가하기로 했다.

내시경 검사를 위해 18시간이나 굶었단 말이지! 물론 평소에도 간헐적 단식을 하기 때문에 18시간이 지난 후에 점심을 먹지만 오늘은 다르다. 아무튼.


또 언제 올지 모르는 광화문 여행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보자고.

사실 급한 건 하나다. 빵집 찾기.

언제나 빵을 제일 좋아한다.

디테일하게 말해보자면 나의 빵 역사는,


어린이였을 때는 빵을 싫어했던 것 같다. 뻑뻑하고, 물리는 맛. 초등학교 때 푸석거리는 소보로빵을 먹고는 사촌언니가 이걸 왜 좋아하는지 궁금해했었다.


스무 살이 되고부터 슬슬 달라졌다. 그보다는, 나를 이해하는 과정?

첫 번째 전환점: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

대학교 1학년 중간고사 기간까지만 해도 아메리카노(=한약) 절대 못 먹어! 상태였는데 기말고사 기간이 되었을 때는 팔뚝보다 큰 990원짜리 커피를 쪽쪽 빨며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마 친구들이랑 카페에 갈 때 다들 아메리카노를 마시니까 몇 번 따라 해 보다가 쓰고 깔쌈한 맛에 눈을 뜬 거라고 추측해 본다.

아메리카노를 먹는데 디저트를 참는 건 쉽지 않다. 정말 쉽지 않다. 특히 내가 아메리카노에 입문했을 2018년도에는 뚱카롱이 엄청난 인기였어서 아아 한 잔에 뚱카롱은 세트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아메리카노 한 잔만 먹으려다가도, 계산대 앞에 서면


“앗, 저 크림브릴레 마카롱 하나만...”


하지만 개인의 역사는 제각각이므로, 당연하게도 나의 역사 또한 조금은 다르다.


마카롱은 마~냥 달콤해버리잖아. 나는

달콤+고소=스콘, 휘낭시에, 크로와상, 에그타르트

달콤+씀=다크초코베이글, 초코칩바게트

이런 류의 디저트를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번갈아가며 먹는 걸 참 좋아한다.


이 사이에는 숨겨놓은 두 번째 전환점이 있는데, 20대 중반이었다.

그때는 탐스러운 비주얼의 크림디저트(크림도넛, 케이크, 생크림와플)를 좋아하는 나로 살았다. 하지만 그 안에 숨은 나는 크림의 미끄덩거리는 느낌을 꽤나 싫어하고 있었다. 뭉그덕... 뭉그덕... 므에에...

계산대 앞에 일렬로 놓인, 빵빵한 크림으로 채워진 디저트들은 매번 나의 식욕을 자극했기 때문에 속마음을 인정하는 데 몇 년이나 걸렸던 것 같다. 저렇게 알록달록한 디저트가 맛이 없을 리 없다며, 오늘 내 컨디션 문제라며, 핑계를 만들어내며 크림을 싫어하는 나를 부정했다.

나이가 들며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이해 -> 오해 -> 이해의 단계를 거치기도 하나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빵집을 구경하다가 샌드위치 집을 발견한 것이다.

샌드위치는 밥처럼 든든하고 채소 덕분에 건강한 기분도 나고, 무엇보다 빵을 먹은 채로 디저트를 하나 더 먹어도 당당하다. 밖에서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내 안에는 나보다 더 큰 초자아 어르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혼나지 않으려면 빵+빵 조합은 조심해야 한다.

어르신, 샌드위치는 밥이에요 ^^


건강검진 전에 샌드위치를 미리 사면 기분이 미리 좋기 때문에 30분 일찍 나섰다. 하나만 사려다가 에라 모르겠다 두 개 결제. 남은 하나는 저녁에 먹기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검진을 마치니까 11시.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에 미리 사둔 샌드위치를 먹을까 하다가, 밥 먹고 또 카페가 가고 싶을 것 같아서 광화문 광장에서 샌드위치를 먹는다. 왼쪽에는 세종대왕님, 오른쪽은 이순신장군님. 든든하다.

샌드위치를 먹으니 배까지 든든해져서 광장을 몇 바퀴 돌고는 카페에 들어왔다.


건강검진을 핑계로 휴가를 낸 만큼, 다른 면으로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글을 쓰는 것만큼 생산적이기는 힘들지. 아까 광장을 돌다가 발견한 느낌 있는 카페로 발을 돌렸다. 밖에서 봤지만 뭐랄까, 6년 전에 갔던 캘리포니아의 느낌이 나던 카페!


문을 열자,

아, 이 쪽은 뉴욕이었구나.


고래고래 큰소리로 수다 떠는 손님들. 그 사이에 고래고래 주문을 받는 직원들. 너도나도 핏대를 세우고 고생 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랑스러운 분위기에, 콘센트도 눈에 보였겠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노트북을 꺼내서 충전기를 연결하고 글을 써 내려간다. 나 빼고 모두가 시끄럽지만 어떤 소리도 시끄럽지 않다. 고막이 꽉 찼지만 고요한 느낌.


행복해.

사실 광장을 걸을 때부터 행복했다.

아, 샌드위치를 살 때부터.


심지어 아메리카노도 구수하니 딱 내 맞춤! 아직 디저트를 안 먹었으니까 하나 사 먹어볼까 하다가, 마들렌밖에 팔지 않는구나.

20대 후반의 나는 마~냥 달콤한 마들렌을 먹을 바에는 집 가는 길에 유행하는 두바이 초콜릿을 사기로 했다. 아직 도전할 디저트는 많다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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