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귀국일. 함께 지낸 룸메이트들도 모두 같은 날에 프라하에서 떠나기 때문에 서로 작별 인사를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는 저녁 7시에 출발 예정이니 얼마 남지 않았다. 사실 아직 네시간이나 남았다. 일찍 도착하는 버릇은 죽을때까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심심하기도 하고, 마지막날을 기념하기 위해 아침부터 반나절동안의 기록을 남긴다. 이제 정말 안녕. 프라하.
어제 새벽까지 룸메이트들과 떠들다가 제일 먼저 기절해서 제일 먼저 일어났다. 다들 잠들어있는 아침에 조용히 단백질 초코 푸딩 먹기. 중간에 살짝 권태기도 겪었지만 끝까지 참 맛있구나. 한국에 사갈까 하다가 캐리어가 이미 4천 킬로라서 참았다.
원래는 전날 야식으로 먹으려 했던 라면이지만 잠에 들어버려서 아침으로 노선 변경. 아침에 라면을 먹는 건 어렸을 적 가족과 캠핑할 때 이후로 처음이다. 잘츠부르크에서 만난 한국 어머니께 받은 부루착도 개시했다. 어머니의 은혜가 프라하까지 닿았다.
짐은 숙소에 남겨두고 마지막 관광지 비셰흐라드에 방문했다. 먼저 다녀온 친구가 그림이 기가 막히다고 해서 가봤더니 정말 예술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유리 공예구나. 자세히 보니 옷감의 결까지 섬세하게 구현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성당이나 유리화에 대한 지식이 많은 친구와 함께 왔으면 더 다채롭게 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이쪽에 대해서는 무지한 나는 오랜시간동안 빤히 쳐다만 보다가 돌아왔다. 미리 공부하고 올 걸 그랬나? 시간을 돌이킨다 해도 하지 않았겠지만.
공항으로 떠나기 한 시간 전,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서 30분 정도만 앉아있다 가기로. 그런데 이곳에서 인생 코르타도를 만나버렸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여행 내내 대부분은 코르타도를 먹어왔다. 배가 부담스럽게 부르지도 않고, 커피 향이 진하게 나면서도 부드러워서 가장 취향이었다. 사장님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를 추천받을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코르타도를 주문할까 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한 입 먹고 이마를 탁. 유럽에 와서 마신 커피 중 단연 1등이었다. 뭐랄까, 산미가 있는 건 아닌데 풍미가 멜로디처럼 유려하게 춤췄다. 따라라라라. 처음에는 커피맛이 강하게 나더니 점점 우유맛으로 번지다가 끝에는 미숫가루만큼 깊은 고소한 맛이 난다. 살짝 뻑뻑한가 싶을 정도로 크리미한 부드러움. 생크림인가? 하지만 달지 않았다. 압도적인 스팀 실력이다. 비결을 묻고 싶지만 사장님의 무뚝뚝한 표정에 말을 걸 자신이 없었다. 조용히 아껴먹자. 한국에 돌아가서도 여러 카페를 뒤져볼 수밖에.
정말 맛있는 커피는 마실 때마다 당황스럽다. 지금도 그렇다. 어이가 없네. 미쳤나 봐. 식으면 식은 대로 다른 느낌으로 또 맛있다. 맛도 사진처럼 찍어둘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커피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사장님이 와서 괜찮냐고 물어보신다. 인생에서 먹은 커피 중에 최고라고 대답하자 당연하다는 듯이 끄덕. 알고 계시는군요. 어떤 원두를 쓰냐고 여쭤봤는데 자신만의 원두가 있단다. 직접 만드신다는 걸까? 구매 욕구가 샘솟았다. 하지만 역시나 캐리어 무게 이슈로 포기.
아쉬운 감정은 아련함을 가져다주기도 해서 그만의 매력이 있다. 남겨두는 것도 좋다.
룸메이트 귀요미 동생이 깜짝 편지를 선물해 주었다. 끝까지 귀여워버리는구나. 가끔 귀여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나 통통튀는 귀여운 짓을 해야 귀여워 보이나 보다. 어려울 것 같다.
마지막 한 끼는 과일로. 과일의 덕을 많이 봤다. 유럽의 고기는 잡내가 너무 심해서 아무리 맛있어도 네다섯 시간이 지나면 단전에서부터 정육점 냄새가 올라온다. 빵은 마트의 밀가루 냄새만 맡아도 울렁울렁. 파스타는 여행 3일 차에 부다페스트에서 먹은 치즈파스타 이후로 물려버렸다.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는 내 모습은 처음이라 낯설었다. 참치김치찌개, 불닭발, 날치알주먹밥, 뿌링클, 비빔밥, 연어초밥, 계란찜, 더덕무침.
마지막 날 뒤늦은 신고식을 치렀다. 캐리어에 들어가지 않는 짐을 종이가방에 넣은 게 원인이었다. 위태위태하다 싶더니 신호등을 건너다 가랑이가 찢어지고 말았다. 으, 방심했어. 종이가방을 껴안고 10분 정도 걸으니 문구점이 나와서 비닐가방을 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던지... 손이 부족한 나를 대신해서 온갖 문을 열어준 수많은 프라하 주민들 감사합니다.
이제 곧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타면 어느새 한국 땅 위에 서 있겠지. 아직 유럽 땅 위에 두 발 뻗고 서 있지만 더 이상의 경험은 없다.
여행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