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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름 Sep 22. 2024

유럽 런웨이를 1열에서?

한인민박에 있다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유럽에 오기 전에는 해봤자 교환학생이나, 유학생, 혹은 퇴사를 한 사람들, 아니면 나처럼 휴가를 낸 직장인 정도를 만나겠거니 했다. 하지만 세상은 수천 피스의 퍼즐이었고, 한 조각 안의 세계에 살고 있던 나는 다른 조각으로의 원정 여행에 기겁을 하고 있다.

이런 세계가 있었어? 여긴 또 어디야?


프라하에서는 셋이서 한 방에 자고 있다. 한 명은 21살 귀요미. 150cm를 겨우 넘는 자그마한 키에 몸집도 작아서 귀여워 죽겠다. 눈도 동글 얼굴도 동글. 무슨 말만 하면 푸학 하고 활짝 웃어댄다. 딸기잼 파이를 좋아한다. 딸기잼 파이라니. 정말 귀여워.

그리고 다른 한 명은 36살 디자이너 언니. 처음에 대학생이라고 해서 또래이겠거니 했는데 나보다 10살이 많았다. 여러 사정이 있어 만학도로서 벨기에의 명문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결코 30대의 피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16살이 어울렸다.

우리는 처음 만난 날 밤부터 새벽까지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대었고, 프라하에서 넷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새벽에 이불을 코까지 덮고(8도였는데 보일러가 없어서 너무 추웠다.) 대화를 주고받고 있노라면 수련회에 온 것 같았다. 잘 시간이야. 우리 이제 진짜 자야 해. 하고서는 ‘근데 있잖아...’ 하고 또 30분. 보통 잠이 많이 쏟아지던 사람은 나였나 보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눈을 떠보면 이미 아침이 되어 다들 잠들어있기도 했다.

언니는 프라하에서 열리는 런웨이에 디자이너로서 참석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내 앞에서 하버드 티셔츠 입고 우헤헤 웃고 있는 언니가 런웨이 디자이너라니, 예상도 못한 반전이었다. 어떤 옷을 만드는지는 아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피날레를 장식한다고. 엄청난 사람이잖아?

언니는 내일 열리는 런웨이에 우리를 초대해주었다. 프라하에는 지인이 없기 때문에 게스트 티켓이 남아있다며. 우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가겠다고 대답했다. 심지어 귀요미는 프라하에서의 숙박을 연장했다.

다음 날, 언니는 아침부터 가기 싫다며 늦장을 부리다가 허겁지겁 나가버렸고, 나는 언니 아침 설거지를 대신하면서 ‘우리 언니 잘할 수 있을까...’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런웨이 시작은 오후 다섯 시. 귀요미와 꽃을 사서 언니가 있는 무대로 향했다. 그런데,


프라하 멋쟁이들 여기 다 모였네. 서양 인플루언서 대잔치. 동양인 아예 없음.


여기 패딩 입은 거 우리밖에 없는 거 맞지.

언니, 우리 빼고 다 180cm 넘는 것 같은데.

그러게. 얘네 시야에 우리가 있긴 할까?


큰 놈들이 더 한다.

분명 모델들은 백스테이지에 있을 텐데, 우리처럼 구경 온 사람들일 텐데도, 겉모습은 마치 모델이거나 디자인계의 거장 같았다. 그들이 지나쳐가면 머리칼에 바람이 슝슝 불었다. 왜 이렇게 모델처럼 걷는 거야. 멋있어서 혼났다.


혼자 왔으면 웁스, 쏴리,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있다는 든든함에 힘입어 당당히 맨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심지어 우리 언니는 피날레 디자이너란 말이지.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쇼는 곧 시작되었고 헉소리나는 모델들이 헉소리나는 옷을 입고 헉소리나는 워킹을 했다. 우와, 이게 런웨이구나. 저 모델들의 세계는 어떨까. 구경할 수 없는 미지의 조각이었다. 그때였다.


엄청나게 마르고 늘씬하고 세련된 모델이 걸어 나오는데 팔뚝의 불주사가 눈에 띈 것이었다. 엇, 불주사네! 반가웠다.

그래. 저 여성도 아기였을 때가 있었어. 갓 태어나 의사 선생님이 엉덩이를 팡-치면 뿌앵-하고 울음을 터트렸을 아기가 어엿히 자라서 수백 명의 사람 앞에서 워킹을 하고 있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과 걸음걸이를 선보이고 있다. 대견해.


무대를 진행할수록 각양각색의 모델을 마주했다. 시니어 모델, 배가 불룩 나온 모델, 심지어 의수를 찬 모델도 있었는데, 나는 그 모델이 내 앞을 여섯 번이나 지나갈 동안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옆 자리에 앉은 귀요미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걸어오는 그녀의 아우라에 모든 시선을 뺏겼던 것이다. 그녀의 역사를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언니의 무대는 아홉 시였기 때문에 네 시간 동안을 기다려야 했는데, 시간은 빠른 속도로 뛰어와서 어느새 언니의 순서에 다 달았다. 왜 우리가 떨리지. 언니도 떨고 있을까? 아무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곧 음악이 바뀌고 언니가 디자인한 옷을 입은 모델이 등장했다. 계속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다. 최고로 멋있었고, 한동안 고생했을 그녀의 모습이 (본 적도 없는데도) 아른거렸고, 지금도 백스테이지에서 피팅을 수정하느라 정신없을 그녀가 안쓰러웠고, 그녀가 지나온 길이, 또 이 순간이 자랑스러웠다. 누가 보면 친언니인 줄 알겠다.


런웨이 전날 밤에 언니가 그랬다. 스무 살에 런던의 명문대에 붙었었는데, 비행기를 탈 돈이 없어서 포기해야 했다고. 그때 세상과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다고. 서른이 넘을 때까지 한국에서 돈을 벌다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모전이 열렸고, 대상을 수상해서 장학생으로 이곳 벨기에에 왔다고. 신은 아마 있는 것 같다고.

언니는 디자인을 사랑하고, 사랑했다. 그 사랑이 원단 하나하나에 흠뻑 묻어져 있는 것이다. 사랑은 심금을 뒤흔드는 마법을 일으킨다. 강력한 힘이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언니의 힘을 온몸으로 체감했을 것이다.

다음날까지도 마음이 찡하게 울려대서 나도 참 주책이구나, 싶었다.


나와 귀요미는 쇼가 끝나자마자 먼저 돌아오고, 언니는 애프터파티를 하고 새벽에 돌아왔다. 한 끼도 먹지 못해서 야식으로 치킨을 사 왔단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널브러지는 언니. 아까 그 멋진 디자이너는 어디 간 거지. 그날 새벽도 졸린 눈을 끔뻑거리며 수다를 떨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아침이 되어 깨어보니 언니는 옆 자리에서 쿨쿨. 야식도 잘 먹고, 잘 씻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든 듯했다. 이전까지 밤새 선 잠을 자며 뒤척였던 언니를 알기 때문에, 오늘만이라도 방해받지 않고 푹 잤으면 해서 잠옷 차림에 패딩만 걸치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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