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푹 자고 일어나면 나아지겠지, 했던 우울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수면제를 먹은 덕분에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자서 몸은 개운했다.
일어나서 핸드폰을 켜니 프라하는 홍수주의보가 발령되어 있었다. 날씨는 8도. 이렇게 추운 날씨에 남은 일주일을 청자켓으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아침부터 빈티지샵 쇼핑에 나섰다. 비바람이 강하게 불어 우산을 쓰는 게 의미가 없었다. 이래서 유럽 사람들이 우산을 쓰지 않는 건가?
네 시간 동안 다섯 개의 가게를 돌며 맨투맨과 요가복 세트를 구매했다. 요가복 세트? 저녁에 요가 일일체험을 신청했다. 여행 시작 때부터 매일 아침 유튜브를 보면서 요가를 하고 있는데, 프라하에는 유명한 요가원이 많다고 해서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한 것이다. 체코어를 쓰니까 말은 안 통하겠지만 흘긋거리며 따라 하면 될 일이었다.
당장 한 번의 체험을 위해 급하게 구매하는 옷이지만 오래 입기를 바라는 마음에 신중해져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연스레 미뤄진 점심시간.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지만 입맛이 없었다. 세상에서 빵과 초콜릿을 제일 좋아하는 나임에도, 그 또한 먹고 싶지 않았다. 상큼한 과일이나 먹자 하고 납작 복숭아와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 파란 과일을 사서 모짜렐라 치즈와 함께 먹었다.
숙소에서 점심을 먹자마자 요가원으로 출발했다. 한 시간을 걸어가야 했기 때문에 서둘렀다. 밖에는 더욱 거세진 폭풍우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작부터 위태위태하다가, 카를교를 건너는 도중에는 우산이 찢어지고 말았다. 우산도 너덜, 나도 너덜.
요가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산발을 하고 지쳐있으니 직원이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가져온 휴지로 젖은 발바닥을 꼼꼼히 닦고 요가 시작.
하타 요가 프로그램을 들었는데, 부담스럽지 않은 난이도에 중간에 요상한 노래도 부르고(?) 마지막에는 낮잠도 10분 정도 자니 하루 중에 제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은 두배로 험난. 비는 여전히 강하게 쏟아지고 있었고, 밤이 되니 칼바람이 더해졌다. 집 가는 길에 보이는 모든 옷가게를 들렸지만 마음에 차는 겉옷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도 구매하지 않았다. 아직 살만 한가 보네. 생각했다.
배가 또 꼬르륵거리길래 저녁거리를 사가기로 했다. 역시나 입맛 없음. 마트에서 30분 넘게 서성이다가 사과 하나를 골랐다. 계산대에 서서 카드를 찾는데, 카드가 없었다. 어디 갔지.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잃어버렸나? 분실신고를 해야 하나? 우선 집까지 15분만 더 걸어가면 되니까, 사과를 다시 제자리에 두고 숙소까지 뛰어갔다. 한 번 미끄러져주고, 벌떡 일어나서 다시 총총. 집에 도착 직전에는 온몸이 으슬거리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카드를 찾기 시작했다. 찾을 것도 없었다. 열어둔 캐리어 위에 떡하니 놓여 있는 새하얀 카드. 반가워라. 그리고 바로 옆에 보이는 마지막 누룽지와 조미김. 이걸 먹어야겠어. 이전 숙소에서 안 먹고 가져온 소시지도 꺼내어 먹었다. 뜨거운 누룽지가 식도를 빠르게 지나갔다. 좀 살 것 같았다. 뜨거운 물을 수시로 리필하며 먹으니 배도 적당히 찼다. 비엔나에서 알미언니에게 선물 받은 초콜릿이 남아있어서 먹으려 했는데 막상 배가 차니 얼른 누워버리고 싶어졌다. 대신 침대에 누워서 sns를 들락날락거리고 있으니 곧 룸메이트들이 저녁을 먹고 도착했다. 같이 먹자고 했었지만 몸이 안 좋아서 그들만 나가서 먹고 돌아온 것이었다. 그들 또한 비바람에 지쳐있었다. 내 왼쪽 자리에서 자는 지은언니가 침대에 철퍼덕 널브러져서는 말했다. “집 가고 싶어. 당장 오늘.”
언니의 목소리가 내 뇌리에 박혀서 뎅그르르 굴렀다. 나 또한, 집 가고 싶어. 당장 오늘. 의 마음으로 변신. 하지만 표를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의 200만 원짜리 비행기표란 말이에요. 그러자 언니가 대답했다. “그렇게 정가로 산 비행기표는 무조건 변경 가능이지. 한 번 찾아봐.”
아, 언니 제가 전에 비행기표 결제할 때 찾아봤는데 취소 수수료가 15만 원이더라고요.라고 말은 하면서 손가락은 비행기표 변경을 알아보고 있었다. 세상에. 만약 이틀 더 빨리 돌아가는 표라면 공짜로 변경할 수 있었다. 분명 취소 수수료는 15만 원이라고 써져 있었지만 아래로 창을 내리면 실제 결제 금액은 0원이었다. 왜 그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나중에 공항에서 돈 더 내라고 하는 거 아니야? 설마 그러겠어~ 하고 조금 더 고민해 보다가 표를 바꿔버렸다. 남은 숙소비가 아깝기도 했지만 어차피 집에서 자는 비용은 공짜니까. 돈이 더 드는 건 아니니까. 내가 진정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집중했다.
뷔페에 가면 꼭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댄다. 결국 체해서는 가스활명수를 먹으며 후회한다. 적당히 먹을걸. 만족스러울 만큼 먹었다 싶으면 숟가락 내려놓기. 늘 실패하지만,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에게 맞는 양만큼만 가져오는 것. 뷔페에만 적용될 일이 아니었다.
오래 버틴다고 해서 뽕을 뽑는 게 아니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집에 가고 싶었다. 집으로 갈래. 나는 조금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