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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름 May 21. 2023

2. 꿉꿉한 오곡라테

     '영업시간 AM 11:00 ~ PM 6:00'

    붉은빛에 아쉬움을 담아 작별인사를 나누는 가을, 한수동을 지키는 수많은 건물 사이에서 산란하는 빛을 흠뻑 머금고 있는 카페가 있다. 지금은 여섯 시 반. 원래라면 문을 닫았을 시간이지만, 단골손님 가을의 영업시간을 늘려달라는 투정에 못 이긴 사장은 여태껏 카페를 지키고 있다. 사장은 때로 '고양이 밥 주러 갑니다'라는 팻말을 걸어놓고 휴가를 떠나기도 하고, 긴 장마가 내리는 날이면 '무릎이 쑤셔서 장마 끝나면 돌아올게요' 라며 일주일 동안 문을 닫아두기도 했다. 뒤죽박죽 사장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운영 철칙은 오직 하나.

    '커피는 사장이 고른다.'

    따랑- 하는 종소리가 울리면 사장은 들어오는 손님을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는 금세 뒤를 돌아 손님을 위해 정성스러운 커피를 내린다. 손님은 카운터 앞에 서서 자신에게 선사될 커피를 기다린다. 주문은 필요 없다. 단골손님이라고 똑같은 메뉴를 주는 것도 아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이 풍기는 5초의 기운 만으로 그날의 메뉴는 결정된다. 신기한 것은 그 누구도 커피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기막힌 커피를 추천해 주는 사장의 안목 탓에 언젠가 사장이 무당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한수동 일대를 주름잡고 있는 3층짜리 편의점 건물 주인 황금자씨의 귀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꽤 신빙성이 있던 소문이었다. 소문을 들은 황금자씨가 괄괄하고 웃으며 수년간 매주 로또를 사는 사장이 지금껏 5등조차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자마자 잠잠해져 버렸다고.

    일전에는 사장이 의사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다방커피를 내놓으라고 진상을 부리는 아저씨에게 사장이 아메리카노를 주면서 건강검진을 받아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 것이었다. 심지어 사장의 말로 못 이기는 척 건강검진을 받은 아저씨가 정말 당뇨 초기를 진단받은 것. 이후에 소식을 들은 사장은 '그거 참 기분이 좋군요!' 하며 소문을 널리 퍼트려달라 했지만 얼굴만 보면 병명을 맞추는 용한 의사가 한수동의 후미진 골목에서 돈벌이도 안 되는 카페를 할 리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소문은 일단락되었다. 가을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다. 사장은 기본적인 사칙연산도 어려워하여 모든 커피를 4천 원에 팔았으니까.

    가을은 사장에 대해 떠도는 모든 소문을 빠삭히 알고 있다. 물론 동네에 커피 오마카세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저 흥미로운 수준으로 여겼다. 커피 오마카세의 첫 방문 날, 꽤나 취향에 맞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주는 사장을 마주했을 때도 '20대 여성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니면 자몽에이드 아닌가?' 하며 의심하던 그녀였다. 흥미가 떨어진 가을은 그렇게 커피 오마카세를 잊고 지냈다.

    가을이 커피 오마카세의 단골고객이 된 사건은 세 달 전 목요일 저녁에 발발했다. 그 날은 잊을 수가 없다. 실수 없이 착착 진행되어도 기한을 맞출까 말까 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중 발표에 쓰일 ppt 파일을 날려버린 것이다. 가을의 육체와 정신이 와장창, 와르르, 바사삭 깨져버렸던 날.

    "배고픈데 배불러."

    하루 종일 욕을 너무 먹어서 그런가, 저녁을 먹지 않았음에도 배가 더부룩했다.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를 끝내기 위해 재택근무를 하러 가는 길, 웬일로 평소 6시까지만 여는 커피 오마카세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안 그래도 쏟아지는 잠을 깨우기 위해 커피를 사려던 참이었기에,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한 가을은 그 길로 커피 오마카세의 문을 열었다. 5초 동안 가을을 바라보던 사장은 이내 큰 머그잔에 가득 담은 오곡라테를 선사했다. 빈 속에 꿉꿉한 오곡라테 한 입을 먹은 가을은 어릴 적 자신이 배고파하는 밤마다 엄마가 야식으로 만들어주던 미숫가루가 떠올랐단다. 4남매의 장녀인 가을은 어느샌가부터 힘든 일이 있어도 부모님께 티를 낼 수 없는 불치병이 생겼다. 그런데 마치 모든 걸 알아버린 엄마가 자신을 꼭 안아주는 기분이었다고. 

    그날로부터 가을의 궁금증은 폭발 직전의 화산이 되었다. 

    오곡라테의 그 맛, 우연이었을까? 우연이라기에는 심금을 울리는 맛이었단 말이지. 왜 하필 오곡라테를? 그것도 그렇게 든든한 양으로? 내가 저녁을 안 먹었다는 걸 알았던 걸까? 어떻게 알았지? 늦은 시간에 회식냄새를 뿜지 않고 찾아와서? 사장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출생의 비밀이 있는 건 아닐까. 설마, 사람은 맞겠지? 

    어쩌면 폭발 중인 화산일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가을은 사장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영업시간을 늘려달라고 생떼를 부리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커피오마카세에 들리는 중이다.

    단 한 명의 손님을 위해 기꺼이 한 시간 더 일해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에 가을은 매일 밤 사장을 위한 빵을 만들어서 보답한다. 그의 퇴근 후 일상은 이렇게 루틴화되었다. 퇴근 후에 커피 오마카세에 들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집 앞 김밥천국에서 김밥 두 줄을 먹는다.

    '한 줄은 부족하고 두 줄은 많단 말이지.'

    터질 것 같은 배를 통통 치며 집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가을의 두 번째 자아의 시간이 열린다. 바로 ‘방구석 파티시에’.

    빵을 좋아하는 가을은 중학교 때부터 방과 후학습으로 베이킹을 배웠다. 고등학생 때도 유튜브로 베이킹을 독학해서 빵을 만들고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물하던 아이였다. 가을은 어른이 되면 자신의 집을 베이커리로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런 가을이 정작 어른이 되고 회사에 취업하면서 홀로 서울에 상경한 이후로는 오히려 빵집을 찾기 시작했더란다. 그 이유는 베이킹을 하면 버거울 정도로 많아지는 양 때문이었다. 아무리 적게 만들어보려 해도 최소 4~5인분은 되고, 나눠줄 사람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몇 끼를 같은 빵만 먹는 건 아무리 빵을 좋아하는 자신이라도 물릴 수밖에 없단 말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서울살이를 할수록 빵을 사는 행위에 대한 반감은 늘어만 갔다. 이렇게까지 바가지를 씌운다니. 500원이면 만들 수 있는 식빵을 빵집에서는 10배는 비싸게 팔았다. 언젠가는 억울한 마음에 식빵 열개를 만들고 냉동실에 넣어놓으려 한 적도 있었다. 식빵은 말 그대로 '식'빵이니까. 식사 대용이니까 금방 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냉동실은 이미 만두와 떡갈비로 포화상태였고, 매일 식빵을 여섯 장씩은 먹어야 상하기 전에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아침은 구운 식빵, 점심은 샌드위치, 저녁에는 프랜치토스트를 일주일 내내 먹던 가을은 눈물을 머금고 곰팡이가 핀 절반의 식빵을 버려야 했다. 그 여파로 가을의 베이커리는 잠정적으로 문을 닫았던 것이다. 동시에 식빵은 가을의 금기음식이 되었다.

    그러니까 사장님에게 빵을 선물하는 것은 가을 역시 행복한 일이다. 사장을 위한다는 핑계로 양껏 만들어서 자신도 먹을 수 있으니. 또 빵 한 개를 사 먹는 가격이나 열개를 만드는 가격이나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에 금전적으로도 부담이 없었다.

    때로는 사장님과 트러블이 생기기도 했다. 가을이 초코크림빵을 만들어간 날 사장이 카페모카를 선사해 준 것이다. 초코빵에 어떻게 초코커피를 먹냐며, 크림빵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딱이라며 구시렁거리는 가을에게 사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가을씨는 누가 뭐래도 카페모카의 날이에요."

    생각해 보면 초코가 먹고 싶어서 초코크림빵을 만들었으니 가을의 마음을 얼추 꿰뚫은 것은 맞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잖아. 가을은 마음속으로 한 번 더 투덜거리며 초코크림빵 한 입, 카페모카 한 입을 번갈아가며 먹었다. 심지어 사장은 가을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초코크림빵을 먹는 괘씸한 모습까지 보였다.

    '초코를 먹고 싶은 마음은 알아도 이미 초코를 준비했다는 걸 모르는 걸 보면 무당은 아닌 게 분명해.'

    방구석 파티시에 가을은 오늘 아침 출근하는 버스에서부터 휘낭시에를 만들고 싶었다. 인고의 고민 끝에 선정한 최종 메뉴는 '메이플피칸 휘낭시에'. 이전에는 두뇌회전에 좋다는 호두를 주기적으로 챙겨 먹곤 했다. 하지만 호두파이를 만들어서 사장에게 선물한 날 그가 호두 알레르기가 있었다는 걸 안 이후로는 호두를 대신해서 집 안에 피칸을 한껏 구비해 두었다. 여느 날처럼 커피오마카세에 들렸다가 김밥 두 줄을 먹고 집에 도착한 가을은 버터를 녹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 아저씨는 누구일까'

    가을은 오늘 커피 오마카세 입구에서 한 아저씨와 마주쳤다. 문 앞에서 마주치다 보니 서로 부딪칠 뻔했기 때문에 고개를 들 법도 한데 푹 숙이고 서두르는 모습이 의아스러웠달까. 세 달 동안 매일 커피오마카세에 들리면서 이 시간에 오는 손님은 전부 파악했다. 그런데 그는 누구일까.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가을은 버터가 타는 냄새를 맡고 나서야 생각 우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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