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파구 노트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했다면 누구나 초등학교나 늦어도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최소한 10년 이상 영어를 배운다. 외국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다들 놀란다. 먼저 오랜 기간에 놀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알아듣고 말도 어버버 하는 모습에 또 한번 놀란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다른 과목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배우고 익히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영어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교육을 받으면서 생기는 문제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그렇게 오래 배웠는데 왠지 영어를 못하면 좀 부족한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인지 외국인을 만나면 피하고, 설령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하더라도 도중에 다른 한국인이 나타나면 그나마 어버버 하던 것도 아예 말문이 막힌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것이다.
나도 MIT로 파견 갔을 때 영어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다. 복도에서 교수나 학생들과 눈이 마주치는 것이 불편했다. 눈이 마주치면 인사하며 말을 건네는데 매번 어버버 하는 내 모습이 너무 싫었다. 중학교 때 배운 인사는 "How are you?"하면 "I am fine, thank you, and you?"였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무용지물인 다이얼로그다.
교수와의 1:1 미팅은 더 고역이었다. 못 알아듣고 있지만 교수의 말 끝마다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나를 내가 봐도 이해가 안 간다. 가장 난감한 순간은 교수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나를 쳐다보고 있을 때다. 웁스! 질문문으로 끝난 것이다. 내가 대답할 차례이지만 무슨 질문이었는지 감도 안 온다. 보통은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데, 미국 교수들은 인내심이 아주 좋아서 계속 기다린다. 고민 끝에 질문을 유추하여 대답을 한다. 오 마이 갓! 교수의 표정을 보니 또다시 동문서답을 한 모양이다. 오늘도 교수에게 보인 내 모습은 아이큐 50은 까진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룹 미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한 마디도 못하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가장 곤욕스러운 순간은 미팅 도중에 갑자기 사람들이 손을 들어 투표를 하는 순간이다. 질문을 놓쳤고, 의도하지 않게 나는 매번 NO에 투표를 한 셈이 됐다.
어느 날 영어에 대해서 한국인 박사과정 학생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 과정에서 당연하면서도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배우게 되었다.
한국 학생들이 유학을 오면 하는 실수가 영어를 못 알아들으면서도 알아듣는 척하는 거예요. 한 번 알아듣는 척하면 그 뒤에는 되돌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악순환이 시작되죠. 교수와의 미팅에서 알아들은 척하고 나오면, 그다음 미팅에 엉뚱한 내용을 가지고 가게 되고, 이러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못 알아 들었으면 그 순간에 다시 물어보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인데 말이죠. 보통 이걸 깨닫는데 몇 년씩은 걸리더라고요.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딱 내 얘기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영어는 단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수단인데, 나는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영어는 단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수단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의사소통이 목적이지, 영어 자체를 유창하게 하는지의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점차 잘 되는 것이 느껴졌다. 파견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깨닫게 된 점이 너무 아쉬울 따름이었다.
3년 후 다시 실리콘밸리로 UX센터 설립의 미션을 받고 주재원 발령을 받게 되었다. 3년 동안 영어를 말하지 않다가 다시 시작해서 그런지 예전의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 못 알아들어도 자동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MIT 파견 기간에는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연구를 하면 됐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센터를 설립하고, 우수 인력을 채용하고, 프로젝트 기획을 하고, 프로세스를 만들고 조직을 이끌어야 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잘 못되면 조직이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가 있었다. 즉, 어떻게든 의사소통을 제대로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아쉬운 사람이었고 내가 우물을 파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는 신경도 안 쓰게 되었다. 영어가 안되면 손짓, 발짓, 몸짓, 눈짓, 별 짓을 다해서라도 나의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해야만 했다.
영어는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 중 하나다
3년간의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 몸소 체험한 것은 바로 영어는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 중 하나라는 것이다. 주재원 초기에는 영어에 대한 트라우마를 없애기 위해 매일같이 다음의 내용을 스스로에게 세뇌시켰고 효과를 봤다.
영어는 단지 도구다. 문법은 아무도 신경 안 쓴다. 관심도 없다. 발음이 후졌다고 지적할 사람도 없다. 어떻게든 의사소통만 되면 된다. 중국 가서 중국어 못한다고 눈치 안 보고, 독일 가서 독어 못한다고 눈치 안 보고, 일본 가서 일본어 못한다고 눈치 안 보는데, 왜, 왜, 왜 미국 와서 영어 못한다고 눈치를 보는가? 모든 언어는 단지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다.
지금은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나 외국인에 대한 불편함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못 알아들으면 바로바로 다시 물어볼 수도 있고 의사소통이 잘 되는 편이다. 그동안 내가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익숙해지기 위해서 노력했던 방법들을 공유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1. 영어는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세뇌시킨다.
2. 혼자 있을 때 최대한 크게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는다.
3. 정확한 발음은 사전을 찾아서 확인하고 반복 연습한다.
4. 영어는 매일 30분 이상 듣는다.
5. 해당 나라의 문화를 먼저 이해한다. 문화를 이해해야만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6. 외국인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와 함께 자신 있게 내가 먼저 인사한다.
7. 대화 중에 못 알아들은 내용이 있으면 그 즉시 질문한다.
8. 대화 내용을 이해했어도 다시 한번 이해한 내용을 설명하고 맞는지 확인한다.
9. 이메일을 쓸 때는 원어민 이메일에서 적합한 표현을 찾아 활용한다.
영어는 도구이기 때문에 사용을 하지 않으면 다시 서툴러진다. 도구를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주 사용하여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시험 위주 교육으로 온 국민이 고생하고 있지만, 우리 자녀 세대에서는 제대로 된 교육으로 세계 속에서 올바른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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