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파구 노트
2006년 MIT 미디어랩 파견 시절의 일이다. 탠저블 인터페이스(tangible interfaces) 수업을 들으면서 'Beyond Channel'이라는 제목으로 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프로젝트 주제 선정 동기는 TV 상에서 점점 채널 수가 많아지면서 원하는 컨텐츠를 쉽게 찾아 감상할 수 있는 직관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UI)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고민한 끝에 마음에 드는 컨셉을 도출했다. 현재 시청하고 있는 TV 화면에서는 방해를 받지 않고, 터치 스크린을 갖는 별도의 디바이스를 이용하여 다른 채널의 컨텐츠를 쉽게 검색하고 미리 보기를 할 수 있는 탠저블 UI를 제시하는 아이디어였다. 그때 당시에는 iPad와 같은 태블릿 제품이 없었던 시절이지만, 지금으로 말하면 조금 크기가 큰 태블릿(테이블탑)과 2인치 정도의 작은 디스플레이 퍽(puck)을 이용하여 컨텐츠를 검색, 미리 보기 및 TV 화면에서 보기 등을 제어하는 아이디어였다. 구체화시킨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실제로 작동하는 워킹 프로토타입까지 완성하였고, 프로젝트 결과 발표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 완료 후, S전자 협력 담당 교수였던 존 마에다 교수와의 정기 미팅에서 'Beyond Channel' 프로젝트 결과를 소개하고 자신 있게 데모도 보여드렸다. 프로젝트 내용을 들으시고 존 마에다 교수께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행복해지나요?
참고로, 존 마에다 교수는 공학자이자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MIT 교수 및 RISD 총장을 거쳐 최근에는 실리콘밸리로 자리를 옮겨 벤처 생태계에 디자인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분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기 때문에 순간 당황했지만, 아마도 직관적인 방식으로 수많은 채널들을 쉽게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연히 더 행복해질 것 같다고 대답했다. 답을 하면서도 나 자신에게도 조금 께름칙했고, 미팅을 마치고 나와서도 계속 이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말로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는 걸까?'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되어있다. 행복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나서 다시 'Beyond Channel' 프로젝트 결과물을 보면 존 마에다 교수의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해지는 것 같다.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는 것과 프로젝트 결과물과는 큰 연관성은 없다고 말이다. 물론 많은 컨텐츠를 한 눈에 쉽게 보고 검색과 미리 보기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전체 컨텐츠를 확인하지 않고 TV를 보는 상태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TV를 볼 때 행복감을 느낀다면 컨텐츠를 보는 과정에서 만족감이나 기쁨을 느끼는 것이지 내가 현재의 수많은 컨텐츠 중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찾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10년이 지난 지금도 채널 수는 크게 증가했지만 전체 컨텐츠를 쉽게 탐색하지 못한다고 해서 느껴야 할 행복을 못 느끼는 경우는 없다.
굳이 TV의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대해서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는다면, MIT 미디어랩의 마이클 보브 교수께서 농담처럼 이야기하셨던 버튼이 두 개만 있는 리모컨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버튼 하나는 "Entertain Me"(나를 즐겁게 해줘) 버튼이고, 나머지 하나는 "Power Off" 버튼이다. 사용자는 아무 고민 없이 "Entertain Me" 버튼만 누르면 TV가 알아서 사용자가 가장 만족할 만한 컨텐츠를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로, 당장은 기술적으로 어렵겠지만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충분히 구현할 수 있는 아이디어이다. 이런 리모컨이 있다면 사람들이 컨텐츠를 볼 때 만족감을 느끼는 경험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미디어랩에서 참여했던 허거블(Huggable) 프로젝트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아이디어에 충실하게 정의된 프로젝트였다. 증가하는 독거 노년층을 위한 애완용 곰 인형 로봇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였고, 테라피 효과까지 갖도록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곰 인형이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고 고개를 돌려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안아 달라고도 하고 사람과 다양한 상호 작용을 한다. 만지거나 안아주면 동물처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등의 다양한 감정으로 반응한다. 프로젝트의 로드맵 상에는 실제로 테라피 효과에 대한 임상 실험도 계획하고 있었다. 즉, 연구개발 및 디자인을 철저하게 사람의 행복을 위한 목표로 설정한 것이다.
기획 단계부터 사람들의 행복을 고려하자
앞으로 새로운 것을 디자인하거나 연구개발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면, 기획 단계부터 사람들의 행복을 고려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정의하는 작업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한다. 물론 기업 내에서는 순수한 관점만으로는 연구개발이 쉽지 않겠지만, 사업성을 확보할 수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교집합을 찾으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특히 디자인, 연구개발, 기획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면, 앞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에는 꼭 아래의 질문을 던지는 것을 잊지 말자.
그래서 사람들이 행복해지는가?
#돌파구노트 #연구원 #디자이너 #행복 #UI #UX #존마에다교수 #텐저블인터페이스 #투버튼리모컨 #허거블 #로봇 #테라피 #사업성 #질문 #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