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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May 17. 2022

나는 시를 사랑하고,  댄스 뮤직에 몸을 흔들죠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 내 경우 보여지는 이미지가 아담하고 차분하다. 가만히 있으면 종종 ‘참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참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좋게 봐주니 고마운 마음과 함께 숨이 턱 막히기도 한다. 나는 이제 그이의 기대에 부응하여 참한 존재가 되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내 안에 꿈틀거리는 개그에의 욕망과 덜렁 거림과 생각 없음을 그들이 알 리 만무하다. 종종 파격적인 모습을 접하게 된 지인들은 나의 수상한 행보에 의아해한다. 그이의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나.      


 직장에서건 사적인 자리에서건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려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첫 이미지 또는 한두 달 정도 사이에 보인 행동이나 말투 등으로 ‘아, 넌 이런 사람이지’, ‘그 사람 원래 그래’라고 쉽게 결론짓는다. 그들은 스스로 상대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관계 속 불안을 떨쳐버리려 한다. 전형적인 존재들이 재미는 없어도 안전하게 느껴지니까. 그리고 고민할 것 없이 자신이 만든 전형적인 존재들 카테고리 안에 넣고 전형적인 대응을 해주면 되니까. 그러다 가끔 상대가 예상 밖의 행동을 하게 되면 적잖이 당황한다. ‘보기와 다르네’, ‘쟤 원래 저런 애였냐’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탐색의 결과에 오류가 생긴 것이다. 여기서 청소년 드라마 단골 대사였던 ‘너답지 않게 왜 그래 – 나다운 게 어떤 건데?’가 등장하게 된다.      


 그래 나다운 게 어떤 걸까. 나라는 존재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시를 사랑하고 댄스 뮤직에 몸을 흔든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지만, 친구들과의 수다에 스트레스가 풀린다. 산 냄새를 좋아하고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몸을 담그기도 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좋아하지만 흰 눈이 짙은 회색이 되도록 다 같이 뒹구는 것도 좋아한다. 한가롭고 낯선 골목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만 한여름 밤 왁자지껄한 대로변의 웃음과 흥분에 애정을 느낀다. 속닥거리는 친구도 좋고 호탕하게 웃어 제끼는 친구도 좋다. 고독을 음미하지만 TV 예능 프로그램을 찾아보며 깔깔거린다. 이상 시인을 동경하여 그의 사진을 명찰에 달고 다니던 여고생이 그해 여름 야영 마지막 날 밤 장기자랑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 춤을 추며 무대를 누볐다. 시꺼먼 구레나룻을 그리고 파란색 나팔바지를 펄럭이며.     


 이러니 나는 누구일까, 어떤 인간일까에 대해 고민한 시간이 길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같은 재미없고 특징 없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특출한 개성이나 장점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 그들이 뿜어내는 특유의 분위기를 동경했다. 자신에게 가장 평온한 상태를 찾아내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세상에 당당하게 소개하는 사람들, 자신을 단 한 가지의 색깔로 표현해 내는 사람들을 볼 때면, 대체 어느 정도의 수행 과정을 지나왔기에 스스로를 저리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세상은 특별한 존재들의 이야기로 넘쳐났다. 나를 드러내기에 나는 너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조금 기다렸다. 나이가 들어가고 세월이 쌓이면 나도 나만의 색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점점 더 헷갈렸다. 나는 점점 더 정체성 없는 인간으로 늙어가고 있었다. 내 색깔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하고 있을 땐, 저것이 내 모습인 것 같고, 저것을 하고 있을 땐 이것이 본질이 아닐까 의심하며 길을 헤맸다.      


 그런데 이것도 좋아하고 저것도 좋아하는 게 나였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나’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나인 것’이다. 남들이 말하는 차분해 보이는 참한 이도 나고, 둠칫 두둠칫 리듬에 몸을 맡기는 흥부자도 나다. 새빨갛고 새파랗지는 않더라도 불그스름하다가 푸르뎅뎅할 수도 있는 존재, 이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우물 파는 것도 재주이지만 다양한 것을 사랑하며 사는 삶도 재주다.      


 불그스름 푸르뎅뎅 알록달록일지 얼룩덜룩인지 모를 인생을 그대로 인정해버리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나의 첫인상을 배신하는 일로 인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카테고리 안에서 내쳐지는 일, 상대가 훅 들어왔다가 쑥 나가는 일들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기는 좀 더 노력해볼 일이다. 당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미안하지만, 뻔한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앞으로 만나게 될 그대들은 우리 불그스름 푸르뎅뎅이들의 수상한 행보에 너무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길. 우린 얌전하게 생겼지만, 부뚜막엔 먼저 올라갈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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