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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May 31. 2022

기막힌 오타




 친한 동료에게 백석 필사하기 책을 선물 받았다.

아카시아꽃 향기 가득한 날, 백석의 시 ‘정문촌’을 따라 적다가

‘나는 열 살이 넘도록 갈지자(字) 둘을 울었다’에서 멈췄다.

왜 울었을까, 먼지가 겹겹이 앉은 목각 현판에 새겨진 ‘효자노적지지정문孝子盧迪之之旌門’.

갈지자 둘이면 그리도 서글플 일인가, 열 살이 넘도록 울음이 날 일인가, 지지之之는 내가 모르는 계절의 슬픈 소리인가 의미인가, ‘시’라는 건 역시나 홀로 고귀한 것인가.

풀리지 않는 시구에 골몰하다가 잠시 의기소침해졌다가, 지지之之 지지之之 소리 내어 보다가 이상한 마음에 책장에 꽂혀있는 백석의 시집 ‘사슴’을 찾아들어 ‘정문촌’을 살핀다.

가즈랑집을 지나 여우난골족을 지나 여승과 통영을 지나쳐 정문촌이다.     


‘효자노적지지정문孝子盧迪之之旌門’-먼지가 겹겹이 앉은 목각의 액에

나는 열 살이 넘도록 갈지자 둘을 웃었다     


‘울었다’가 아니라 ‘웃었다’였나.

그래, 지지之之라는 글자를 본 어린아이가 웃음이 나야 자연스럽지 울음이 난다니 이상했다.

나는 필사책의 기막힌 오타에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헷갈리다가

열다섯에 늙은 말꾼한테 시집을 갔을 가난이가 떠올라서

퇴락한 가문의 몰락 앞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다시 생각했다.      

아카시아꽃 향기 가득한 5월에 백석의 시를 필사하며,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가득하니 꿀벌들이 많이 날아드는 아침의 정문촌 풍경을 떠올린다. 그래서 정문집의 몰락은 더욱 서글프다.

시를 들여다보며 문득, 필사책의 기막힌 오타는 의도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정문촌旌門村

                                                                           백석     주홍칠이 날은 정문旌門이 하나 마을 어구에 있었다     


 ' 효자노적지지정문孝子盧迪之之旌門 'ㅡ몬지가 겹겹이 앉은 목각木刻의 額에

 나는 열 살이 넘도록 갈지字 둘을 웃었다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가득하니 꿀벌들이 많이 날어드는 아츰

구신은 없고 부헝이가 담벽을 띠쫗고 죽었다


기왓골에 배암이 푸르스름히 빛난 달밤이 있었다

 아이들은 쪽재피같이 먼 길을 돌았다     


정문旌門집 가난이는 열다섯에

늙은 말꾼한테 시집을 갔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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