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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Jun 04. 2022

거기 꽃분홍 당신이 있었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봄날



 평범한 일상이 정지 화면이 되어 각인되는 순간이 있죠.      


 요즘은 대부분의 순간이 정지 화면입니다. 제게 1년이라는 시간이 선물처럼 주어졌거든요. 달리던 기차에서 내려 보니 짬짬이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시원하고 기분 좋게 느껴지는지요. 기한이 정해져 있는 쉼이라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나 봅니다. 그래서겠죠. 문득문득 삶의 순간이 정지 화면이 되어 다가옵니다. 아침 등산길에 만난 초록이 반질반질한 풀잎도, 무심한 듯 놓인 나무 벤치도, 천장에 붙어있는 무당벌레조차 낯설게 느껴집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정지된 시간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낯설고 사랑스러운 풍경은 평일 아침의 풍경입니다. 평일 아침 우리 동네 풍경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풍경이죠. 평일 아침에는 늘 붐비는 도로 위에 있었으니까요. 아이들은 엄마 손을 잡고, 교복 입은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등교하는 모습이, 그 재잘거림이 낯설고 새삼스럽고 사랑스러워 멈춰 서서 풍경을 바라보기도 하고, 무리 속을 같이 걸어보기도 합니다.     


 그날 아침도 동네를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데 사람은 없고, 바퀴 달린 파란 플라스틱 통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밀걸레, 빗자루, 락스, 집게 같은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파랗고 빨갛고 노랗게 엘리베이터를 채우고 있더군요. 본능적인 낯가림으로 낯선 존재를 주시하는 동안 5층에서 문이 열렸고, 밀걸레를 든 어르신 한 분이 들어오셨죠. 미소가 주름처럼 파여 있었어요. 7층 어디에 사냐 하여 7층 어디에 산다 하니 매번 현관문에 붙은 전단지를 떼 주어 고맙다고 하셨어요. 주름처럼 오래된 미소로요. 


 그건 우리 집 현관문에 덕지덕지 붙은 무례함이 보기 싫었을 뿐이었어요. 불시에 걸려 오는 광고 전화나 스팸 문자처럼요. 누군가를 위한 일이 아니었죠. 나는 겸연쩍게 웃었고, 어르신의 꽃분홍 조끼가 봄날의 꽃밭 같다 생각했어요.      


 바퀴 달린 파란 플라스틱 통은 청소 도구함이었어요. 어르신이 층마다 바닥을 쓸고 닦는 동안 엘리베이터 안에 놓여있어요. 누군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버튼을 누르면 파란 플라스틱 통이 밀걸레, 빗자루, 락스, 집게 같은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층과 층을 오가며 낯선 이들을 만나는 상상을 했어요. 그리고 그 어색하고 낯선 순간을 떠올렸죠.     


 아파트 현관이나 엘리베이터, 계단은 늘 회색빛이었어요. 그곳엔 지나가는 발길만 있지, 머무는 발길이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어요. 깨끗하게 정돈된 당연한 상태 뒤에 인자한 미소로 머무는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적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길가 화단에 가지런히 피어있는 낮달맞이꽃과 팬지꽃도 누군가의 머무는 손길이고, 산길 자리 자리마다 정겹게 쌓여있는 돌탑들도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들의 소망이겠죠. 남쪽 어느 항구의 색 바랜 노란 리본도, 우크라이나의 총성 속 결의도.     


 그때부터였죠. 매일 아침 산책을 다녀온 후 아파트 입구에서 낡은 운동화의 흙먼지를 정성을 다해 털어내기 시작했어요. 비가 오는 날이면 물기를 꾹꾹 짜내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매트 위에서 슥슥 좀 더 오랜 시간 낡은 신발을 닦아냈어요. 그리고 손톱만 한 휴지 조각도 거슬리게 되었죠.    

  

 그건 거기, 그곳에도 오래된 미소가 있다는 걸 알고부터예요. 거기에도 당신이, 노랗고 빨갛게 꽃분홍 꽃잎을 피워내며 봄을 창작하고 있다는 걸 알고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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