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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Jun 09. 2022

시집 위에 손톱을 깎다가



 늦은 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당기는데 왼손 검지 손톱 자리가 따끔하다. 손톱이 갈라져 이불 어딘가에 걸린 것이다. 언제 손톱이 이렇게 길었을까. 그냥 두면 피가 날 것 같아서 다시 일어나 앉았다. 새벽 2시였다. 아침엔 출근 준비로 바쁘니 지금 일어나야 한다. 어차피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던 참이었다. 손톱깎이를 들고 거실로 나가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다. 무심코 집어 든 것이 하필이면 시집이었다. 시집 위에 손톱을 깎았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집 속에 담긴 시들, 시에 담긴 고뇌와 열정을 모욕한 것 같았다. 적막했고, 은빛 손톱깎이의 날카로운 소리가 거실을 채우며 적막을 더욱 부추겼다. 잘려 나온 손톱이 그믐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손톱달이 아무렇게나 놓여 우는 것 같기도 했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 형광등 아래서 손가락 마디마디가 유독 창백하고 앙상하게 느껴졌다. 앙상한 손마디가 움직일 때마다 손톱이 떨어졌다. 이번엔 입술 모양을 하고 있었다. 떨어진 입술들이 시집 위에서 웃고 있기도 했고 울고 있기도 했다. 손톱을 바닥으로 밀어내 버렸다. 어쩌다 시집 위에 손톱을 깎고 있냐고 스스로를 나무랐다.     


 손은 언제부터 메마르고 창백했던 걸까. 오늘 저녁엔 크림 파스타를 먹었고, 어제는 갈비탕을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손은 왜, 언제나 메마르고 창백하게 움직이는 걸까. 메마른 손으로 나는 무얼 잡을 수 있을까. 아니 무얼 잡고 싶었던 걸까. 애초에 무얼 잡을 수 있기는 한 걸까. 메말라 버린 건 손뿐인 걸까.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시일까, 사랑일까, 열정일까.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지는 건 삶이 아쉬워서일까, 버거워서일까. 뭐 하나 명쾌한 것은 없고 물음표와 오답만이 가득하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밤은 지나치게 길지만, 또 아침은 빨리 온다. 아침은 간밤의 그리움을 접고 오늘의 해야 할 일들을 수행하는 나로서 서게 한다. 그래서 나는 아침이 오기 전에 손톱을 깎아야 하는 것이다. 해야 할 일들은 일상을 지탱하게 해 주지만, 쏟아내는 삶은 결핍을 부른다. 결핍은 웃음을 가져가고 나는 어제보다 오늘 좀 더 메말랐다.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하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에 다니고, 남들 다 그렇듯 평범하게 여유가 없다.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버거움의 평균치가 너무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손톱을 깎는 것도 여유가 필요한 일이다. 나는 스스로를 챙기는 삶을 살아가지 못했고, 그 이전에, 삶은 손톱 자를 시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길어진 손톱은 때때로 나와 당신의 심장을 할퀸다. 새벽 2시에 손톱을 깎는 일은 나를 위한 일일까, 당신을 위한 일일까. 그 또한 애매모호하다.      


 책장에 꽂혀 있는 시집은 박제된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매몰되어 있는 화석 같기도 하다. 슬픔 위에 슬픔이, 그리움 위에 그리움이 쌓여 돌처럼 굳어져 버린 것 같다. 펼치지 못한 시집 속에 잠들어 있는 시들은 피우다 얼어버린 목련 같다. 그런 시집을 무심코 꺼내버렸다. 어둠 속에서 나의 무의식은 시집이 꽂힌 자리로 팔을 뻗게 했지만, 사실 나는 언제나 그곳을 의식하고 있었다. 시를 읽으며 가슴 아리고, 탄복했던 시간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내 안에는 여전히 그리움이 자라고 있고, 어쩌면 나는 시집 앞에서 손톱을 깎으며 그리움을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움이 손톱달이 되어 내 앞에 있다. 그리움의 형체를 마주하자 안도가 은은하게 밀려왔다. 메말라가는 손과 마음에 물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이 다가온다. 여전히 아침은 빨리 오고, 손톱은 자꾸만 길어질 것이다. 괜찮다. 내게는 아직 일말의 감수성이 남아 있고, 시집 위에 손톱을 깎으면서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남은 감수성이 시들지 않도록 물을 주는 법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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