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을 쓰다듬어
아침이다. 눈을 뜨고 첫 번째 할 일은 가족들에게 아침을 알리는 일이다. 직장이 코앞인 남편은 좀 더 자도록 두고, 아이 방으로 가서 아침입니다- 아침이요- 하면, 본격적인 아침 루틴이 시작된다. 창밖으로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긴다. 초1 아이가 등교 준비를 하는 모습이 내 씅(성)에 찰 리 없지만, 지켜본다. 관심 가득한 무관심, 따뜻한 무관심을 되뇌며 인내한다. 씻고, 입고, 묶고(머리카락), 먹고 나면, 아이의 손을 잡는다. 오늘도 주어진 하루를 위해, 즐겁고 평온한 너의 오늘을 위해 온 맘으로 기도해준다.
그 사이 남편이 일어나서 어기적어기적 집 안을 왔다 갔다 하면, 간단해도 나름 5대 영양소 갖춰진 아침을 내놓는다. 아침 루틴 사이사이 창밖으로 보이는 가을을 흘끗거린다. 남편이 현관으로 간다. 다녀오쎄요~ 할 때의 목소리가 너무 신나게 들리지 않도록 주의한다. 모두 갔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아침 내내 흘끗거리던 가을을 마주한다. 뒷산은 초록이 벗겨지고 잎새마다 가을이 농익어가고 있다.
휴직을 하면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초1 하교 시간은 유치원보다 훨 빠르고, 주말도 아이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할 수 있을 법한데 하지 못해서 더 아쉬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 노트북을 켜고 브런치에 접속해 본다. 아까부터 새 글이 올라왔다는 알람이 울리고 있다. 브런치 메인 화면을 보는데, 작은 글씨로 브런치가 묻고 있었다.
계절을 잃어버리셨나요?
역시 브런치는 감수성 가득한 플랫폼이구나 생각했다. 가을이 되니 마음을 휘젓는 이런 찰떡같은 질문을 던지는구나 싶었다. “맞아요.”라고 소리 내어 답한다. 근데 이걸 왜 묻지? 설문 조사 중인가 싶어 다시 들여다보니,
아...이런 아직 노안은 아닌데, 잠이 덜 깬 것도 아닌데. 계정을 계절로, 잊다를 잃다로 제멋대로 읽어버렸다. 이것은 분명 가을을 마주하고 있는 애달픈 마음이 벌인 장난질일 것이다. 핫하하.. 더 안쓰러워지기 전에 웃음으로 마무리 짓는다.
가을이 농익어가는 걸 보며, 스스로 계절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애달픈 마음이 뇌의 착각을 불러왔나 보다. 계절을 잃어버린 자. 이 말은 종종 학교에서 소녀 소년들에게 던지는 말이다. 정녕 계절을 잃어버린 자들은 학교에 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1차원적인 서사다.
찬바람 쌩쌩 부는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급식실 앞에서 줄을 서 있는데, 검은 패딩 무리들 틈으로 살굿빛 형체가 아른거린다. 열다섯 소년 M이다. M을 본 순간 기겁해서 소리쳤다. “M아!! 안 추워?!!?” 검은 패딩 사이로 보이던 살굿빛 형체는 다름 아닌 소년 M의 팔다리였던 것이다. 반팔을 입고 추위 속에 급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M아 왜 이러는 게냐. 계절을 잊고 사니. 춥지도 않니. 혼자 여름이니. 이 추위에 이게 다 뭔 일이냐. 이러지 말자. 이건 아니다. 엄마가 아시면 얼마나 속상하시겠니.” 선생님의 진심으로 기겁한 조언을 듣던 M은 “하나도 안 추운데요. 시원해요-.”라 답한다. 진심일까. 아무리 열이 펄펄 끓는 청춘이라도 이 추위에 반팔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자연인이다’ 냉수마찰 할아버지도 아니고 이 무슨. 귀찮아서 저러는 걸까. 뭐가 귀찮지? 반팔 입을 시간에 긴팔을 입으면 되잖아. 아, 열다섯의 속내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교실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있다. 한여름에 긴 옷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거나, 한겨울에 달랑 티셔츠 한 장 걸치고 오들오들 떨고 있기도 한다. 곰인가 인간인가. 안 덥니? 겉옷을 좀 벗는 게 어떠니, 춥지도 않아? 옷을 입어! 같은 말을 할 때면,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다는 듯 주섬주섬 겉옷을 벗거나, 입는 소녀 소년들이 있다.
한겨울에 교복 치마를 입은 소녀들을 볼 때면 안쓰럽기 그지없는데, 그 와중에 스타킹도 신지 않고 맨다리로 다니는 소녀들을 볼 때면 내 다리가 다 얼얼하고 따갑다. 입술은 퍼렇고 종아리는 발개진 소녀가 맨다리도 패션이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더울 때 시원하게, 추울 때 따뜻하게 입는 게 진정한 패션 아니겄냐 라고 씨알도 안 먹힐 소릴 한다.
계절을 잃어버린 소녀 소년들을 볼 때면 마음이 쓰리다. 추위 속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내 몸을 그냥 둔다. 내버려 둔 채 나를 돌보지 않는다.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영 불편하다.
어찌 보면 학교에서의 배움은 다 내 몸과 마음을 돌보는 과정이다. 체육 시간에 땀 뻘뻘 흘리면서 공도 차고 뛰고 구르는 것은 건강한 신체를 위함이다. 가정 시간에 의식주를 배우고, 자기 관리와 안전에 대해서 배우는 것도 나를 돌보는 공부이다. 국어 시간 문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과정도 나를 돌보는 것이고, 점심시간마다 영양소 골고루 갖춘 맛있는 급식을 먹는 일도 나를 돌보는 과정이다. 음악, 미술, 사회 등등은 말해 뭣하랴.
나를 돌보는 일의 출발은 내 몸을 돌보는 일이다. 신선한 음식 먹고, 운동도 하고, 추울 땐 따뜻하게, 피곤하면 좀 쉬고, 일찍 자고. 물론 부모님이라는 든든한 양육자가 있지만, 부모님의 돌봄은 아동기까지만 기대하기로 한다. 부모님의 돌봄으로 지금의 소녀 소년들이 있지 않은가. 이미 충분한 돌봄을 받아왔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아는 법이다. 나를 잘 돌볼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하고, 자신을 돌볼 줄 알아야 타인을 돌볼 수 있다.
곧 겨울이 다가온다. 독한 감기에 걸려 지독하게 고생하기 전에 스타킹 챙겨 신고, 빵빵한 패딩을 꺼내자. 그전에 산으로 들로 나가 가을을 누려보아야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를 돌보기 위해 노트북을 닫고 현관을 나서야겠다. 계정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계절은 사수해야겠다. 혼자서 낙엽에 얼굴이라도 비벼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