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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Dec 14. 2022

담임이라는 것




 학년을 마무리할 즈음이면 마음이 소란하다. 내년도 업무 희망서를 마주하며 생각이 많아진다. 희망을 적는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일은 많지 않지만 일말의 기대를 품고 희망을 작성해 본다. 몇 해 전부터는 어김없이 ‘담임’이라는 글자 앞에서 커서가 멈추고 깜빡인다. 검지손가락으로 톡톡톡 마우스를 두드린다. 커피의 온기가 사라지고 내적 갈등은 깊어진다.

  나는 담임을 희망하는가.      



 첫 담임을 맡았던 때를 기억한다. 그날의 설렘을 잊을 수가 없다. 교직의 꽃은 담임이라 생각했건만 스물다섯 첫해에는 내게 담임을 맡기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속상했다. 얼른 우리 반을 만나서 우리 반 아이들과 알뜰살뜰히 한 해 농사를 지어보고 싶었다.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해주고 싶은 말도 많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인사 담당자로서는 온당한 결정을 하였다. 나보다 한참 영근 선배 교사들도 있었고, 나야말로 말이 선생이지, 어제까진 책만 붙들고 있던 학생이었다가 오늘부터 갑자기 교단에 선, 내면화가 덜 된 교사였기 때문이다. 앞의 글에서도 이야기했듯 스물다섯나는 아(애)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고, 알맹이도 그랬다. 고3 아이들과는 여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고, 고3뿐만 아니라 중3 학생들이 걸걸한 목소리로 슨생님- 이라고 부르면 네...라는 대답이 절로 나왔다.      



 이듬해 드디어 담임이 되었다. 햇병아리 같은 열네 살 중1 아이들의 담임이었다. 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들 앞에서 나는 어떤 담임이 되어야 하나.. 마음속에선 이미 사랑과 설렘이 폭주하듯 샘솟았고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은 표정으로 드러났다. 표정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불현듯 선배 교사들의 따듯한 조언이 생각났다. 3월에는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 만만하게 보이는 순간 끝이다.     



 최대한 딱딱해 보이는 옷을 골랐다. 가죽 재킷이라도 하나 장만할까 싶었으나 상상만으로도 몹시 안 어울렸다. 머리카락을 바짝 당겨 으른 헤어스타일을 흉내 내보았다가 풀었다.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웠다. 결국에 내가 택한 건 무표정이었다. 최대한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한 달을 버텼다. 그 한 달 동안 아이들 앞에선 웃지도 않았다. 잘못 배워도 한참 잘못 배운 시작이었다.     



 아이들은 별다른 특이사항 없이 잘 따라오는 듯했다. 나는 근엄하고 진지한 선생님 노릇으로 인해 이중생활에 대한  피로감이 있긴 했지만, 또 교실에서의 아기자기한 재미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살짝 아쉽긴 했지만 나름 만족했다. 그렇게 3월의 막바지를 지나는 어느 날의 점심시간이었다. 동료 선생님들과 마주 앉아 느슨하고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 반 아이들이 급식실로 들어서는 부산스러움을 캐치한 순간 재빠르게 표정을 고쳤다. 아이들이 급식 판을 들고 우리가 앉은 주변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시금 근엄하고 진지하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반 반장이었던 소녀 H가 내 옆에 앉은 동료 선생님께 다 들리는 귓속말을 했다.     


선생님, 울슨생님께 이제 그만하셔도 된다고 전해 주셔요...         




... 그리고 연이어,     



      편하게 웃으셔도 된다고 꼭 전해 주셔요 ㅎㅎㅎ     




... 동료 선생님은 그걸 또, 굳이 다시 한번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다 들리는 귓속말로 이미 주변 모든 이들이 죄다 들었는데 말이다. 그들은 숨죽여 웃었고, 나는 숨죽여 울었다. 목 뒷덜미를 시작으로 온몸이 뜨거워져 어질어질했다.     



 그날 종례 시간에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들은 여전히 숨죽여 웃고 있었다. 입을 앙다물고 내 눈치를 살피는 스무 쌍의 어린 눈망울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동안 참았던 한 달 치의 웃음이 진하고 길게 터져 나왔다. 웃다가 눈물이 찔끔 났는데 얼른 훔쳤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어대는데 그제야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얼굴 근육이 제자리를 찾으며 편안해졌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1년은 시작되었다.


 

 그때는 그런 어설픈 이중생활과 연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담임이 하고 싶었다. 아이들과 살 부대끼며 함께하고 싶었고, 풋풋한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었다. 아이들의 삶 속에 뛰어드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아픔을 모른 척하지 않고 같이 울고 같이 웃고 싶었다. 배움의 여정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 모든 것이 간절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여전히 같은 아이들이지만 나는 조금 지쳤다. 아이와 그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절망은 때론 공격적이고 무자비했다. 그 세계는 가시를 세우고 웅크렸으며 쓰다듬던 손길에 가시가 박히기도 했다. 선생님의 뺨을 때렸다는 아이,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을 폭행하는 엄마, 멀리서 들려오는 스산한 소식이 멀지 않게 느껴진다. 마음을 다하는 일에 주춤거리게 되면서 적당한 거리를 찾게 되었고, 허울 좋은 거리두기는 아슬아슬한 안녕을 이어가게 했으며 못내 씁쓸했다. 새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학부모님께 보내드리는 편지에 “아이들의 아픔을 모른척하는 교사는 되지 않겠습니다.”라는 구절을, 어떤 해에는 넣었다가 어떤 해에는 뺐다가 한다.


   

 그러면 혼자서 서글프고 미안하고 두려워진다. 나는 담임이 하고 싶은가. 할 수 있는가. 해도 되는가. ‘담임’이란 글자 앞에서 비상등이 켜졌다. 방향을 잃은 커서가 줄곧 깜빡이며 멈추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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