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배우는 날이다. 교과서에 신경림의 '동해 바다 -후포에서'가 실려 있다. 한 명씩 시를 낭송할 거라고 하자, 설마 반 전체 다요? 한다. 그래 한 명씩 다 할 거라고 하자 의심, 호기심, 기대가 뒤섞인 25쌍의 눈이 제각각이다. 전자 칠판에 넓고 푸른 바다 배경 사진과 시 전문을 띄우고, 파도 소리 BGM을 깔아준다. 지금 여기는 동해 바다, 우리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지요? 하니 오, 쌤, 으아, 뭐예요 ㅋㅋ 난리다.
창가 맨 앞자리 아이부터 일어서서 시를 낭송한다. 중학생, 특히 십대 소년들의 감성과 시는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모든 삶은 시이고, 꽃이기에. 쑥스럽고 어색하지만 시 낭송이 시작되자 교실은 이내 진지해진다.철썩철썩 쏴아아 파도 소리와, 투박하고 거짓 없는 소녀 소년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교실 안을 가득 채운다.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 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나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더듬거리고 느리지만 제법 진지하게 시어를, 마디마디를 읊는다. 꼭꼭 씹는다. 눈을 감고 25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꼬박 1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25개의 떨림으로 가슴속에 '동해 바다 - 후포에서'를 25번 포개어 넣었다.
시를 낭송하는 한 명 한 명이 한 편의 시이고, 66제곱미터 교실은 푸른 바다가, 시편이 된다.
시는 각별하다. 시에 대해서 만큼은 진지했다. 시 한 편에는 한 사람이 들어 있고, 그가 내뱉는 언어는 따뜻하고, 날카롭고, 서글프고, 애달프다. 한 사람과 마주 앉은 것처럼 시를 대했다. 기대하고 설레며 시를 만났다. 잘 지어진 시를 만날 때면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든든했다. 시인에게 경이로움을 느꼈다.
여고 시절 교복 명찰에는 내 얼굴 대신 시인 '이상'의 흑백 사진이 붙어 있었다. 웃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웃을 거리가 없으면 만들어가며 웃어댔던 에너지 넘치는 여고 시절이었다. 깻잎 머리에 보라색 스타킹을 신고 다녔던, 시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고생이었지만 시에 대해서 만큼은 진중했다. 시를 사랑하시던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고, 시를 낭송해 주시는 게 좋았다. 시화전에서 선생님의 시를 찾아 읽었다. 제목이'조그만 사랑의 독백'이었다는 것을기억한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유일한 행복은 시를 공부하는 순간이었다. 공부가 아니었고 달콤한 휴식이었고 보너스 같은 시간이었다.
아이들에게 시는 이런 거야.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오롯이 느끼게 하고 싶었다. 2003년 고 김춘수 시인의 강연회에 갔던 적이 있다. 타계하시기 1년 전쯤이었다. 참고서에 나온 시 해석에 대해서 시인조차도 낯설다고 하셨다. 적어도 아이들에게 시를 해부하는 법부터 가르치고 싶진 않았다. 이 시의 주제는 뭐지? A는 B다 은유법 중요하다 밑줄 긋자, ~처럼, ~같이 직유법 알지? 별표 하고.. 시가 좋아질 리 없다. 그렇다고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할 패기는 없다. 다만 첫 시간만큼은, 중학생이 되고 처음 함께 만나게 될 시만큼은 각작의 감성으로 마음껏 누려보길 바랐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삶을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소녀 소년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언제냐고 물었다. 친구와 싸우고 화해하지 못한 것, 부모님께 함부로 대들었던 것.. 그리고 소녀 S가 '태어난 것이요'라고 말한다. 태어난 것이 왜 후회되느냐 묻자 태어나지 않았으면 친구 때문에 힘들 일도 없었을 거고,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었을 거라 한다. 철 모르고 마냥 제멋대로인 중딩들인 것 같지만 그 속에는 깊이를 모르는 강이 흐르고 슬픔이 있고 후회가 있고 고독이 있다. 시를 만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기 전, 오늘 여러분 가슴에 평생 잊지 못할 시를 심었어요. 앞으로 인생에서 누가 시를 묻는다면 동해바다가 생각나겠지요? 별 것 아닌 일로 가족이, 친구가 미워질 때면 이 시가 생각날지도 모르지요. 티끌만 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보일 때, 좀 더 너그러워져야겠다 스스로를 다독일지도 몰라요. 그럴 때면 훌훌 털고 동해 바다행 티켓을 끊거나 운전대를 잡기도 하겠죠. 널따란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흔들리고 있는 스스로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넬는지도 모르겠어요.
여러분 인생에서 열네 살의 동해 바다를, 시를 기억해주세요. 시가 내게로 온 것처럼 기꺼이 여러분에게도 갈 거예요. 느리게 혹은 순식간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전하고 수업을 마무리하는데, 여러분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라는 의도치 않은 인사를 했다. 나름의 방법으로 오늘 수업에 진심을 다한 아이들을 향한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