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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Oct 11. 2022

눈발 휘날릴 때 너희들을 생각해

열다섯을 쓰다듬어

 2011년 2월 11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안동역에서 정동진행 기차를 탔습니다. 그날은 소녀 소년들이 중학교 졸업을 한 날입니다. 이들의 내력이 살짝 특이합니다. 전교생 23명. 중학교 3년 내내 같은 반, 같은 담임, 같은 국어 선생님과 함께였습니다. 저는 3년 동안 소녀 소년들의 담임이었고, 국어교사였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지지고 볶고 울고 짜고 웃고 뒹굴고 난리부르스를 쳤더랬죠.     


 ‘졸업’이라는 단어는 슬프지만 설렘을 주기도 하죠.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곳은 저에게 첫 학교였습니다. 20대 청춘을 바친 곳이고, 아이들의 졸업과 함께 저도 그곳과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모두에게 특별한 마지막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동진행 기차를 탔습니다. 없는 졸업 여행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비장한 각오로 기안을 올렸습니다. 꼭 그래야만 하느냐, 가더라도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 말씀하시다가 결재를 해주셨습니다. 제 비장한 눈빛 때문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식함이 용기를 발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계획은 간단했습니다. 청송에서 안동으로 시외버스 딱 타고, 안동역에서 기차  타고, 정동진역에서  내리고, 바다  보고, 숙고 딱 가서, 딱 자고, 다시 돌아오면 끝! 정말 간단하지 않습니까. 완벽한 1박 2일 졸업여행 패키지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기차가 출발하고 먹고 떠들다 보니 바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도 내리기 시작합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바다를 볼 수 있겠다 생각하니 들뜹니다. 눈이 꽤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북으로 북으로 올라갈수록 눈발이 점점 더 굵어지더니 눈 때문에 바다가 보이질 않습니다. 하하 오늘은 숙소에 일찍 들어가서 쉬고, 바다는 내일 보면 되니까. 괜찮아 낭만적이야. 했습니다.     


 정동진역에 도착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왔습니다.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왔습니다. 평생 그렇게 쌓인 눈은 처음이었습니다. 강원도 눈은 이런 것이었구나. 정말이지 울 뻔했습니다.    

  

 숙소로 가야 하는데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걸을 수가 없습니다. 어째 소녀 소년들은 신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아.. 그자들은 어찌나 해맑던 지요. 물 만난 물고기 마냥 눈밭을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외로웠습니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녀 소년들 앞에서 당황하지 않은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합니다. 나는 으른이잖아. 으른이라고. 나는 선생이고 저들은 천지분간 못하고 있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 숙소에 전화를 해서 지름길을 전해 듣고 눈을 파헤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길이 난 곳도 있고, 새 길을 만들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숙소까지 어떻게 찾아갔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습니다.      


 숙소로 아이들을 밀어 넣습니다. 일단 한 고비 넘겼습니다. 계속해서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꾹 참습니다. 소녀 소년들이 알 수 없는 온갖 MT용 게임으로 이 밤을 불태우고 있는 동안, 다시 눈길을 파헤쳐 동네를 돌아봅니다. 아까부터 불안한 눈길로 저를 주시하고 있던 소년 2명이 따라나섭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식당이 있어서 내일 아침 식사를 예약해 둡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그 밤의 기억이 없습니다. 잠을 잤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정말 생각이 안 납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기차역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눈 때문에 기차 운행이 멈췄습니다. 1박이 2박으로 강제 연장될 위기입니다. 아이들은요, 더 신난 것 같았습니다. 그래 너희들은 신나게 놀아라. 러운(?) 건 내가 처리한다. 소녀 소년들은 바다로 동네로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소년은 급전(?)이 필요하다며 현금인출기를 향해 삽질을 하며 눈을 파헤칩니다.(삽은 또 어디서 구한 건가요) 그러는 동안 저는 계속해서 대합실을 들락거리며 운행 소식을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긴긴 기다림 끝에 기차가 운행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집에 갈 수 있구나. 오후 늦게 출발한 기차는 저녁이 되어 안동역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청송으로  가면 됩니다. 그러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버스터미널에서 또다시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막차는 출발했고, 버스는 끊겼답니다. 결국 우리는 안동에서 다시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청송으로 돌아온 날, 소녀 소년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사택으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누웠습니다. 잠이 들었는데, 참으로 긴긴 잠이었습니다. 목표한 대로 정말이지 모두에게 특별한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가끔 학교생활이 팍팍하고, 힘들어 죽겠다 싶고, 때려치울까.. 생각될 때면 슬그머니 그날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네 정녕 정동진 눈밭을 구를 때보다 더 기막히고 힘들더란 말이냐...?     

 

 몸서리가 쳐집니다. 그리고 피식 웃음이 납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보내는 것 같습니다. 아시잖아요.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습니다.  해가지고  해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방금도 마무리한 글이 다 날아가서 다시 쓰고 있는 중입니다.. 타이밍이 기막힙니다.)


 학교는 더 한 것 같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소녀 소년들은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정의와 불의가 뒤범벅되어 혼돈의 시간을 보냅니다. 질풍노도의 뜻 그대로 대단히 빠르게 불어오는 바람과 미친 듯이 닥쳐오는 파도 속에 있습니다. 그런 존재들이 모여서 공부를 합니다.     


 자신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고통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많은 소녀 소년들은 입시 지옥에서 신음하고, 오늘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보호를 받지 못해 불안하고 두려운 아이들도 있습니다. 흔들리고 흔들립니다. 겨울이 길고 춥습니다. 그런데 겨울이 길고 추울수록 봄날의 잎새는 더욱 푸르고 찬란합니다.


 그래서 열다섯은 찬란합니다. 열다섯의 긴긴 겨울을 쓰다듬고 싶습니다. 꼭 안고 너는 찬란하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차가운 눈발이 매섭게 뺨을 후려치더라도, 가야 할 기차가 출발하지 않더라도, 기막히게 쓸쓸하더라도 열다섯은 찬란합니다.

                   

졸업 여행 다음 날, 소년 K가 미니홈피에 다음과 같은 글귀와 함께 제 사진을 올렸습니다.    

얼굴 공개가 부담스러워 마스크를 그렸습니다. 입 모양이 안 보여 아쉽지만, 그날의 정서는 눈빛만으로도 어느 정도 전달되는 듯합니다.

 저는 포커페이스가 못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소년 K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렇게 미니홈피 안에 박제되었습니다.      


그날의 사진들 몇 장 더 올립니다.    

 1. 급전(?)이 필요하다며 현금인출기를 향해 폭풍 삽질 중인 소년 2. 눈밭을 뒹구는 소년 3. 대참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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