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코치 신은희 Jul 18. 2021

나만의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닭의 장풀같이 끈질긴 생명력을 배우는 것.

올해로 베란다텃밭을 가꾼지 2년이 되었다. 작년에 이 텃밭에선 많은 기적이 일어났었다. 갖가지 상추가 자라고 치커리가 자라고 청경채, 깻잎, 방울토마토와 파프리카까지 쑥쑥 자라 놀라움을 안겨줬던 보물밭이다.


올해는 개인사정으로 파종이 다소 늦었다. 작년의 가꾸기를 교훈삼아 정말 잘 자라는 애들만 심었다. 반틈은 꽃밭으로 가꾸었다. 피크닉 전시장에서 하는 가드닝 전시를 보고 와선 정원디자인에도 관심이 생겨 공간구성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데려온 채송화 네 자매는 너무너무 어여쁘고 사랑스럽다. 금잔화와 데이지, 아스타, 카랑코에 등은 짧고 강렬하게 살다 갔다... 파테크도 시작해서 모종부터 머리를 잘라주며 길렀다. 바질도 의외로 끈질기다.


올해엔 실내 반려식물도 대폭 늘어서 기존 행운목과 스파티필름 외에 스노우사파이어, 트리안, 몬스테라, 테이블 야자, 샐비어와 페퍼민트, 초코민트 그리고 나만의정원가꾸기 2기 식물로 오이, 방울토마토까지 자라고 있다.


그간 폭염이 심하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실내에 있는 아이들만 신경을 쓰고 바깥 정원을 많이 못 챙겨줬다. 오늘 아침은 비교적 선선해서 나와보니 나의 꽃밭에 닭의 장풀과 애기똥풀, 담쟁이 덩굴과 그 외 갖가지 이름모를 여리여리 풀꽃들 및 클로버들이 천지에 널려 엉켜있었다.


그걸 보고 든 첫 생각은

'와~ 세다!' 였다.

닭의 장풀은 그 새 푸른빛 작고 어여쁜 꽃같이 피워내며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이 아헤들은 내가 데려온 게 아니다. 비만 오고 나면 이 아헤들이 내 텃밭을 수두룩빽빽 잠식해서 솎아낸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분명 뿌리까지 뽑아서 저 멀리 던져두었는데 그 생명력은 보통 질기고 강인한게 아녀서 매번 다시 날아와 뿌리를 내린다. 밟아도, 뽑아도 쑥쑥 자라나서 꽃을 피워낸 이 녀석을 보며 복잡미묘한 생각이 들었다.


내 정원에 들어온 이 아헤들은 잡초가 아니다. 내가 이름을 모른다고 '아무거나(잡)'라고 부를 순 없을만큼 이 녀석들의 세력 확장력은 끝내주게 빠르고 촘촘하다. 잠시 전의를 상실했다.


이것은 작년 초 처음 잡초를 솎아내야 했을 때의 마음가짐과 다르다. 그 땐 '얘네도 생명인데 뽑아내면 아파서 어쩌누' 라는 여린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내 솎아내야 내가 디자인한 대로 정원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정보에 힘입어 아이들도 동원해 다 뽑아냈었다.


올해 초에도 마찬가지였다. 밭을 모두 갈아엎었고 새 흙을 섞어주었고 틈틈이 잡초로 여겨지는 것도 솎아냈었다. 하지만 늘 새로운 생명력이 여전히 움트고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는 이 정원을 보며 의문이 생겼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서로 조화롭게 자라나고 있는데, 일개 인간인 내가 괜히 개입해서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이 닭의 장풀 외 모든 이름모를 풀들에게 존경심이 생겼다. 내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서로 의지하며 자라나고 있는 이 아헤들을 바라보다 문득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이 떠올랐다.


꽃을 심지 않으면 계속해서 잡초만 뽑아야
할 거야. 잡초를 뽑지 말고 꽃을 심어봐.
-존 디마니티 「시크릿실천법」


나는 내 눈앞에 드러난 잡초 라는 부분을 문제라고만 인식해서, 정작 중요한 꽃 심기(본질)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잡초 뽑기(피상적인 문제 해결하기)에만 급급했던 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뒤따라 올라왔다.


정말 웃자라서 내가 아끼는 아스타나 꽃들의 광합성을 가리는 애들만 적당히 솎아준 후, 나만의 정원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생각해 본다.


나는 과연  삶에 꽃을 심고 있는가?

아니면 눈앞에 보이는 잡초만 뽑느라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딸과의 대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