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너랑 잘 지내보고 싶어
민감하고 까칠한 배려자.
그 아이는 뾰족한 송곳이다. 그리고 상냥함이라는 천으로 자신의 뾰족함을 감싸고 다닌다. 밖에 있을 때면 천이 벗겨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바람에 집에 돌아와서는 녹초가 되고 만다. 그 아이는 남들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한다. 반대로 남들이 자신에게 폐 끼치는 것 또한 혐오한다. 자신이 남들을 배려하는 것처럼 남들도 자신을 건들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혼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편안함을 느낀다. 그 아이에게는 한 가지 기벽이 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일정 시간대에 체중계에 오르는 것. 계기판은 20년 동안 같은 숫자를 가리킨다. 그 아이는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자극을 격렬하게 환영한다. 지나친 환영으로 종종 스스로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예민이’다.
나는 예민이를 선택한 적이 없지만, 예민이는 나를 택했다. 엄마는 내 예민함과 산만함이 본인의 잘못된 태교 때문에 생긴 거라고 했다. 엄마가 태중에 나를 품었을 당시, 한 지붕 아래에는 아빠, 엄마, 언니 말고도 한 명의 식구가 더 있었다. 바로, 아빠의 친구.
당시 가족들마저 등 돌린 주정꾼 아저씨를 유일하게 받아준 사람이 아빠였다. 아빠는 아저씨에게 안방을 내주었고, 임신한 엄마는 옥탑방으로 밀려났다. 아저씨는 매일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와 주정을 부렸다. 이 때문에 엄마는 자주 깜짝깜짝 놀랐고, 이는 불안한 태교로 이어졌다. 그렇게 아저씨의 기나긴 ‘주정 태교’와 함께 나는 태어났다.
듣고 보니 내 성향이 잘못된 태교 때문이라는 엄마의 말에 일리가 있어 보였다. 아저씨를 탓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엄마가 임신했는데 아빠도 너무하고, 아저씨도 너무하네! 그 아저씨 지금 어딨어?!” 나는 괜히 성을 냈다. 그러나 이어진 엄마의 대답에 더 이상 성을 낼 수 없었다.
“이제 없어. 자살했어.”
하지만 만약 아저씨가 살아계신들 이미 생겨버린 기질을 탓해서 무슨 의미가 있으리. 과거에서 고개를 돌려 미래로 방향을 틀기로 했다. ‘왜 그랬어’ 보다 생산성 있는 질문은 늘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까’였으니.
기질적으로 예민함을 타고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과거엔 예민함이 사회적으로 그다지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어쩐지 예민한 사람은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내 예민함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속에서는 쏟아져 들어오는 분명한 감각들에 신경이 곤두섰지만,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기 위해 예민하게 신경 썼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밖에 나가서는 남들을 배려하며 사근사근함으로 무장했으나, 집에 와서는 쌓였던 예민함이 폭발하면서 인간 활화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민함 자체를 마비시키려는 건 문제가 있었다. 바꿀 수 없는 기질을 고치려 한다는 건 자신을 거부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예민함의 존재 자체는 사실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되는 경우는 날카로움이 주머니를 뚫고 나와서 나 자신과 타인을 찌를 때였다. 나를 찌르는 일과 남을 찌르는 일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양날의 칼처럼 늘 둘 다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렇다면 날카로운 예민함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오랜 세월을 예민이와 함께 살아온 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법을 찾았다.
첫째, 예민함을 거부하지 않기. 예민함을 잘 다루기 위해 거쳐야 할 첫 번째 관문이다. 예민함은 고쳐야 할 병이 아니라, 바꿀 수 없는 기질이다. 있는 그대로 예민한 기질을 받아들이고 끌어안아야 한다.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예민함을 포용해 보겠다는 태도를 지니는 것은 예민이와 함께 잘 지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
둘째, 예민하게 만드는 환경 차단하기. 팀원 중 한 명은 일할 때 꼭 헤드셋을 낀다. 일정에는 ‘방해 금지 시간’이 있다. 멋진 용기다. 일할 때 소음 때문에 집중이 안 된다면, 헤드셋을 끼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 동료들의 협업 요청이 끊이지 않아서 집중이 어렵다면, 방해 금지 시간을 만들어 협조를 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밖에서는 애초에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을 피하는 것이 좋다. 미처 시끄러운 장소를 피하지 못해 정신이 사나워졌다면,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시각만 차단해도 사나워진 마음이 충분히 누그러지기도 한다.
셋째, 나만의 편안한 장소 찾기. 예민함을 억지로 극복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내 몸과 마음이 편안해하는 나만의 장소를 찾는 것이 좋다. 나는 나만의 장소를 몇 군데 찾아냈다. 말소리를 낼 수 없는 동네의 작은 북바(Book Bar), 분위기가 차분하고 내가 좋아하는 주제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점,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시청각적으로 타인의 방해가 적은 만화카페 등. 내가 좋아하는 나만의 기지는 늘 조용한 편이라서 혹시라도 복불복으로 시끄러운 사람이 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넷째, 섬세한 사람과 어울리기. 나는 예민하기 때문에 섬세한 사람을 사랑한다. 상대의 필요를 잘 알아채는 사람,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사람, 말투와 표정이 호의적인 사람, 어쩌면 나와 같이 또 다른 예민이일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 반대로 배려심이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무심한 사람을 만나면 자아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곤 한다. 실제로 상대가 나를 무시할 의도가 없더라도 상대의 반응이 없으면 예민이는 이를 무시당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섬세한 사람과 더 많이 어울린다.
다섯째, 예민 지수 관리하기. 나처럼 예민한 사람은 평소에도 예민 지수가 높다. 그래서 예민 지수가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도록 잘 관리한다. 스트레스도 남들보다 더 빨리 쌓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스트레스가 쌓였다 싶으면 반복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충분히 휴식을 취한다. 평소에 많이 사용하던 뇌의 영역을 쉬게 하고, 다른 활동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나는 주로 산책을 하거나, 자연을 찾아가거나, 가벼운 운동을 하거나, 드러누워 만화책을 본다. 다 잊고 온전히 쉬는 시간이 끝나면, 예민 지수가 다시 정상 범위 내로 들어온다.
예민이를 포용하고, 예민이가 좋아하는 환경과 사람을 곁에 두고, 예민이를 그때그때 잘 케어해준다면, 예민이는 더 이상 우리를 찌르지 않을 것이다.
예민이는 오늘도 말한다. “나도 너랑 잘 지내보고 싶어.” 나는 그런 예민이를 다독인다. 토닥토닥. 그래. 우리 같이 잘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