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중독된 사람의 특징
“약상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헤어지면서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그는 나와 사귀는 동안에도 본인은 ‘후시딘’이고, 내 상처를 치유해 주겠다고 주장했었다. 마지막까지도 참 한결같았다. 그리고 나는 어리석게도 그동안 그 말을 믿어왔다. 그와 사귀고 헤어지고를 딱 5번 반복할 때까지. 그가 사실은 후시딘이 아니라, 유통기한 지난 물파스인 줄도 모르고.
부모님은 밖에서 나를 소개할 때 우스갯소리로 “저희 둘째 딸이에요. 부전공은 연애에요”라고 하셨다. 완전히 틀린 말이다. 부전공 아니고, 전공이다.
나는 연애사에 있어서 자신에게 상처를 많이 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방치해두고서 사람들이 치고 가면 상처받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상처받았으면 그 환경에서 벗어날 법도 한데 나는 나를 그대로 두었다. 당시엔 뭐가 문제인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렇게 상처받고, 또 상처받을 만한 환경에 계속 나를 노출했다. 상처가 익숙한 나는 지독한 ‘상처 중독자’였다.
길거리에 나앉아 늘 연애를 갈망했다. 누군가 나타나 내 갈증을 해소해 주길 바랐다. 그리고 매번 탄산음료 같은 연애를 했다. 당장의 갈증이 사라질 수 있는 톡톡 쏘는 탄산음료 같은 연애. 마실 땐 좋지만, 건강엔 안 좋은 탄산음료 같은 연애. 이것이 내 연애의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신중하게 고민하기보다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탄산음료를 집어 들었다. 탄산음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갈증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사랑이라는 건 어떤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 마음속에서 자연히 발현되는 게 아닐까”라고 말하고 다니며, 스스로를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이상한 논리로 언제라도 찾아오는 사랑을 언제라도 정당화했다. 사랑이 넘치는 내 연애는 병적이었다. 나에게 해로운 연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요즘 흔히들 이야기하는 가스라이팅 애인도 오케이였다. 궁지에 몰려 더 이상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부업자처럼 외쳤다.
‘누구나 웰컴!’
그중에서도 가장 최악은 내 안에 있는 측은지심이 발현될 때였다. 유독 남들보다 강한 측은지심 때문에 곤경에 처해있는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고, 자꾸만 이상한 남자들을 만났다. 사회 반항적인 사람, 가정이 깨어진 사람, 상처받은 돌싱 등. 이들과의 초반 관계성을 돌아보면 좋아하는 마음은 없었다. 모두 측은지심이었다. 나는 측은지심과 사랑의 감정을 많이 헷갈려 했다. 측은한 감정 자체를 사랑했다.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상처받는 일이 많았다. 충동성이 강했던 전남친은 내 절친과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 왜 나 몰래 밤 중에 내 친구와 단둘이 만났냐고 묻자, “너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었어. 네가 말해주지 않는 너에 대해서 말이야”라는 헛소리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당시엔 이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어떤 상대라도 내가 사랑으로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했다. 결국 그 끝은 모두 실패(이별)였지만.
이별하고 나면 한동안은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었다. 다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지만, 이내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연애할 때마다 상처가 딸려 왔지만, 연애가 없이는 불안했다. ‘상처’냐 ‘불안’이냐를 택하라면 상처였다. 연애를 끊으면 나타나는 금단현상으로 삶이 무가치하다고 느끼고, 일상에서의 활력을 잃어갔기 때문이다. 연애하고 있지 않은 나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체 왜 나는 연애를 끊임없이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왜 자꾸 상처받을 만한 환경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가는 걸까?
연애에 의존이 강한 사람은 애정결핍이 있다고 한다. 유아기에 가정에서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하고, 주변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면 연애에 대한 집착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대체 ‘충분한’ 정도가 어느 정도란 말인지.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목회해야 하는 부모님의 사정상 나는 대체로 방치 속에서 자랐다. 그렇다고 사랑을 안 주신 건 아닌데 충분하지는 않았나 보다. 안에서는 원했던 관심을 충분히 못 받고, 밖에서는 원치 않았던 관심을 너무 많이 받아버린 탓에 이상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누구든 만날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언제든 도망갈 준비를 하는 이상한 아이. 건강한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어쩐지 나부터가 건강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함께 <성인 애착 유형 검사>를 해보았다. 검사 결과, 나는 ‘불안정 애착’에 속했고, 그중에서도 ‘혼란, 공포 회피형’에 속했다. 이 유형은 자기부정과 타인부정을 둘 다 한다고 했다. “나도 별로고, 너도 별로야”라고. 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왔다. 사랑이 넘치는 줄 알았던 나는 사실은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참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도 타인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나만의 문제는 아닌 듯싶다. 요즘 어린 친구들 중에서도 잘못된 연애의 길에 들어서는 친구들을 종종 본다. 과거의 나처럼 감정만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그것이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하는 줄 알면서도 (혹은 모르는 채로) 연애를 계속 이어나간다. 그러나 지독한 상처 중독자로서 먼저 경험한 결과를 공유하자면, 결과는 참담할 것이다. 잘못된 연애는 자아의 행복을 망치고, 심할 경우 정신병을 가져올 수도 있다.
혹시라도 연애를 하고 있는데 불안하고 불행한 마음이 계속 든다면, 이 연애를 지속하는 게 맞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상처받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면, 이제라도 상처받을 만한 환경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더 이상 길가에 자신을 내던져 놓지 말고, 함께 넓은 들판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자신과 타인을 모두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기를.
[부록] 그의 말의 속뜻을 이제야 해석해 본다.
1. 난 달라. 난 안 그래. (최대한 다른 척해볼게.)
2. 딱 한 달만 사귀자. (일단 사귀자. 한 달은 모르겠고.)
3. 담배 끊을게. 술 끊을게. (네 뒤에서는 안 끊을게.)
4. 너 없으면 나 죽어. (한 50~60년 뒤쯤?)
5. 너밖에 없어. (물러터져서 날 받아줄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