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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Sep 02. 2023

이유 없는 우울함은 없다

우울 해부학 교실에서

 “당신도 이유 없이 우울할 때가 있어?”

 “있지.”

 “이유 없이 우울한 이유가 뭘까?”

 “무슨 소리야? 이유가 없지.”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상태가 좋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느닷없이 왜 이렇게 우울한 건지. 인생에 별문제도 없고, 그렇다 할 이유도 없이 우울함이 일상을 습격한 날이다. 출근길은 어제보다 더 길게 느껴지고, 발걸음은 어제보다 더 무겁다. 시간은 똑바로 흐르지 않고 비치적비치적거린다.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있어서 언제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우울함이 나를 꿰뚫고 들어오는 날에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싫어진다. 누군가와 대화하더라도 좀처럼 집중하기 어렵다. 직장에서는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 괜히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으면서 퇴사 의욕을 가득 충전한다. 집에서는 초예민 상태가 된다. 가족에게 마음 쓸 겨를이 없어지고, 작은 마찰도 눈에 먼지나 목 안에 가시처럼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에 실망해 더 깊은 우울감에 빠져든다. 이유 없이 찾아온 우울함은 이렇게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해롭다. 


 그런데 이유 없는 우울함에는 정말로 이유가 없을까?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이 어디 있어. 아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서 못 찾은 게 아닐까? 내가 이유를 찾아볼래!”


 나는 남편에게 뜬금없이 ‘이유 없이 우울한 이유’를 찾겠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리고 우울함의 근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진짜로 우울한 이유가 있었다. 우울한 감정은 객관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퓨즈를 끊어버린다. 그래서 우울함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우리가 이유 없이 우울할 때가 많은 것처럼 느끼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우울함에 빠지는 건 구덩이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구덩이에 빠져있는 사람은 내가 왜 구덩이에 빠졌을까를 곱씹어 보지 않는다. 그저 구덩이에 빠진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할 뿐이다. 구덩이에 빠진 이유를 복기하고, 또다시 빠지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건 ‘구덩이에서 벗어난 이후에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우선은 그곳에서 나와야 다시 삶을 이어갈 테니까. 


 나 또한 우울함이라는 구덩이에서 벗어난 이후에 내 우울함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해부해 보았다. 내 경우에 주된 이유와 예방책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건강 상태가 안 좋아서다. 잠을 푹 자지 못한 날에는 신경이 예민해지고 짜증 내기 쉽다. 건강에 안 좋은 음식을 많이 먹은 날도 그렇다. 나쁜 음식은 몸에서 미묘한 변화를 만들고, 내 감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특히 밀가루를 많이 먹은 날은 속이 더부룩해지면서 불쾌한 감정이 생긴다. 여기에 더해 ‘내가 식단 관리를 제대로 못 하고 있구나’를 인지하게 되는 순간, 불쾌한 감정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다. 


 “행복의 90%는 건강에 달려있다”고 한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건강은 삶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신체 건강과 정신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잠을 푹 자고,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는 등의 관리를 한다.


 둘째, 호르몬 때문이다. 여자의 운명으로 태어났다면, 월경 주기에 따른 PMS(월경전증후군)가 오거나 갱년기로 호르몬에 변화가 생기면서 우울해지기 쉽다. 나는 잘 지내다가 갑자기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고, 마음에 우울 쓰나미가 몰려올 때면 대부분 생리 전 기간이었다.


 이때는 마음을 편하게 먹고, 햇볕을 쬐고, 가벼운 식사와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면서 컨디션을 관리한다. 증상이 너무 심하면 약물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나는 자궁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인해 갱년기 증상이 심했다. 이후 피임약을 먹기 시작한 뒤부터는 증상이 거의 사라졌고, PMS의 정도도 옅어졌다. 호르몬은 우리의 의지보다 강하다. 견뎌낼 수 없다면, 전문의의 도움을 받는 것도 방법이다. 


 셋째, 영혼이 쉬지 못해서다. 자의든 타의든 너무 열심히 살아서다. 나처럼 집요한 성향이 있는 사람은 맹목적으로 달릴 때가 있다. 그런데 쉼 없이 달리기만 하면, 그 속도에 영혼이 따라오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내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기 쉽다. 


 이때는 달리기를 멈추고 영혼이 따라올 수 있도록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 더불어 ‘완벽하게 해내서 성공하자’는 생각보다는 ‘성공이든 실패든 일단 완성해 보자’는 마인드로 부담감을 덜어낸다. 애초에 완벽한 건 없으니까.


 넷째, 과거로부터 가져온 안 좋은 기억 때문이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 해도 수치스러웠던 기억, 상처받았던 기억, 못 견디게 나 자신이 싫었던 기억은 무의식의 영역을 뚫고 의식의 영역으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올 때가 있다. 기질적으로 걱정 많고 두려움 많은 사람이라면 더욱더 과거가 현재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때는 과거의 사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객관화해서 보는 연습을 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 있다. 나는 더 이상 그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다. 트라우마를 남긴 그 사람도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곳에 없으니 더는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과거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은 과거의 그 사건에 나를 다시 데려가는 것과 같다. 내 감정이 편안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그저 먼지처럼 훌훌 털어버린다.


 다섯째, 주변 사람 때문이다. 아마도 가장 다루기 어려운 우울함이 아닐까 싶다. 주변 사람은 내가 어찌한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말을 하는 가족, 가스라이팅하는 상사, 집착하는 연인 등 이런 사람들은 최대한 멀리하고 아예 안 보는 게 좋지만, 현실적으로 끊어내기 어려운 관계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내게 좌절감을 안겨주면서 알게 모르게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내게 나쁜 영향을 주는 사람을 멀리할 수 없다면, 대신 내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을 가능한 곁에 많이 두는 것이 좋다. 나는 좋은 사람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따로 시간을 빼둔다. 


 여섯째, 한국인이라서다. 최근에 안 사실 중 하나다. 한국인은 유독 다른 나라 사람보다 선천적으로 행복 유전자가 적고, 우울 유전자(5-HTTLPR)의 보유율이 높다는 통계가 있다. 이 보유율은 80% 가까이 된다고 하니, 한국인 10명 중 8명은 선천적으로 우울하기 쉬운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국적을 바꿀 순 있어도, 태생을 바꿀 순 없다. 우리는 어떤 민족보다도 더 우울함을 세심하게 다뤄야 한다. 내 경우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의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더 ‘자주’ 행복할 수 있도록.


 이처럼 가벼운 우울부터 묵직한 우울까지 내게는 우울한 이유가 이렇게나 많다. 이유는 모두 가지각색이다. 모양도 다르고, 성분도 다르다. 나의 대표적인 우울함을 여섯 가지로만 분류해서 적었지만, 태양 아래 같은 우울함은 없다. 


 그래서 나는 종종 카데바*가 된 지난 우울함을 가지고 해부실로 들어간다. 내가 지닌 우울을 해부하여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본다. 무작위로 찾아오는 우울함을 다 막을 수는 없지만, 우울의 주요 성분을 알고 나면, 어느 정도는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 이유 없는 우울함은 없다. 


*카데바 : 해부학 실습에 사용하는 시체



사진: UnsplashJørgen Hå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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