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같았던 갱년기를 보내며
자취집에 홀로 있던 어느 겨울날 아침, 난데없이 배에서 지진이라도 난 듯한 뒤흔들림을 느꼈다. 곧 대지진으로 번졌다. 냉랭한 땀이 흘렀다. 제발 누가 와서 나를 좀 살려주거나, 아니면 차라리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이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나는 복부의 맹공을 받아내다가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전복된 자동차처럼 바닥에 가로로 엎드려서는 배를 움켜쥐었다. 공격을 무마하기 위해 떼굴떼굴 나뒹굴어 보지만, 공격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힘겹게 손을 뻗었다. 드디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딱 하나, 119. 이후로 어떻게 응급실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몸이 아픈 것도 서럽지만, 몸이 아픈데 혼자인 건 더 서러웠다. 자취하면서 처음으로 누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서러움과 절실함을 가득 안고 누운 응급실 침대에는 서늘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극심한 생리통인 줄만 알았다. 여자의 운명이 힘 조절을 잘못해서 나를 깊숙이 찌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밀 검사를 해보니 생리통이 아니라 자궁내막증이었다. 언제 이런 불청객이 내 복부에 방문해 있었던가. 허락도 없이 몰래 들어온 것이 안 그래도 괘씸한데, 공습까지 해오다니! 말도 못 하게 괘씸했다.
병원에 가니 치켜 올라간 짙은 눈썹에 양옆으로 찢어진 가느다란 눈을 가진 의사가 약물치료를 시작하자고 했다. 그 약물은 ‘비잔정’이었다.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기억이 딸려 온다. 볼드모트를 볼드모트라 부르지 못하는 그들의 심정이 이해된다.)
수술 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비잔정은 부작용이 아주 많은 호르몬 약임을 알게 되었다. 자궁내막증을 치료하는 것 외에는 세상의 온갖 부작용을 포용하는 약이었다. 약 설명서에는 탈모, 여드름, 체중증가, 유방암 촉진, 수면장애, 우울증, 부정 출혈 등의 각종 부작용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었다. 흡사 부작용끼리 경쟁을 하는 듯해 보이기도 했다. 만약 내게 부작용이 나타난다면, 이 중에서 그나마 뭐가 나을까 상상했다. 하지만 어떤 부작용도 달갑지 않았다.
다음번 진료에서 담당의에게 슬쩍 물었다. “이 약은 부작용이 심각하던데요, 꼭 이 약을 먹어야만 하나요?” 내심 다른 해결 방안을 바라며 담당의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담당의는 단호했다. 전처럼 응급실에 실려 가고 싶지 않으면 “그냥 먹으라”고 했다. 치켜 올라간 그녀의 짙은 눈썹이 그날따라 유난히 더 하늘을 높게 찌르고 있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궁도 주인 닮아서 참 만만치 않게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병원비도 만만치 않았고, 약값도 만만치 않았다. 만만치 않은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갔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나는 흡사 갱년기 증상을 보였다. 부정 출혈, 머리 빠짐, 피부건조증은 어느 정도 참아줄 만했다. 그런데 우울증은 도저히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이 시기에 나는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고, 쉽게 화가 나고, 속상한 일이 많아지고, 우울한 감정에 휩싸여서 누구도 만나기 싫어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감정 조절 장치가 고장난 나는 심각한 ‘과민성 감정 증후군’을 앓았다.
무엇보다도 이따금 자살 충동이 불시로 찾아와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고통스러운 이까짓 인생, 한번 죽어보는 거 어때?’ 당시 친구가 집들이 기념으로 선물해 준 칼이 눈에 띄었다. 그러라고 준 칼이 아닐 텐데 자꾸 다른 의도로 칼을 바라봤다. 부엌에서 칼을 감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날카롭기로 유명한 브랜드의 칼이라 쉽게 세상을 뜰 수 있을 것 같았다.
갱년기는 완벽한 질병이었다. 신체적 변화에, 정서적 변화에, 인지적 변화까지 완벽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결국 나는 호르몬과의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 완패를 인정해야만 했다. 새로운 취미도 만들어 보고, 운동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나마 약간 도움이 된 것은 지인들과의 통화였다. 그러나 매 순간 전화기를 붙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시기를 겪으며 불현듯 몇 년 전 “갱년기가 왔다”고 말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당시 엄마가 갱년기가 왔다고 했을 때, 우리 가족은 엄마의 갱년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면서 “갱년기는 다 오는 거 아니야? 그런 건 의지로 극복해야지. 매일 그렇게 화내면 어떻게 해. 엄마도 노력해야 할 것 아니야!” 라고 면박을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엄마가 집에서 화를 내던 게 다 호르몬 때문이라니. 우울해하던 게 다 호르몬 때문이라니. 서운해하던 게 다 호르몬 때문이라니. 서러움 가득 머금은 얼굴로 “너도 내 나이 돼봐라!”라고 외치던 엄마의 감정이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전달되었다. 호르몬 대환장 파티를 겪고 있을 엄마를 더 배려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뒤늦게 몰려왔다.
갱년기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겪어본 사람만 안다.
엄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호르몬을 이길 방법은 없어 보였다. 지리멸렬 상태에 빠진 내가 나를 죽이기 전에 조치가 필요했다. 우선 ‘그 약’부터 끊어야 했다.
다시 진료를 보러 병원에 갔다. 이전처럼 배가 아파 떼굴떼굴 구를지언정 이 약만큼은 먹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내 아파서 떼굴떼굴 구르던 그때의 고통이 떠올라 다시 마음이 바뀌었다가도, 약 먹다가 우울해서 죽는 것보단 떼굴떼굴이 낫지 않나, 하고 병원 가는 길 내내 고통을 저울질했다.
병원에 가서 다른 약이 없냐고 물었고, 약을 바꿔 달라고 했다. 그리고 불친절한 담당의도 바꿔 달라고 했다. 나는 진료 외에도 친절한 사람에게는 타인의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결국 약을 ‘그 약’에서 ‘야즈’로 바꿨다. 사실 야즈는 피임약이라서 치료에는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래도 간혹가다 혹의 크기가 작아질 수도 있고, 생리통만큼은 방지해 준다고 하니 그것만으로 감지덕지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야즈로 바꾸고 나서 잃어버렸던 삶을 되찾았다. 나를 괴롭히던 깊은 우울증도 사라졌다. 정말이지 갱년기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물론 언젠가 또 올테지만...벌써 슬프다.
우리는 호르몬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이길 수 없다”. 호르몬은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막강한 상대였다. 단순히 의지력만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호르몬은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 같았다. 소용돌이 안에서는 그 어떤 발버둥도 소용없었다. 이 소용돌이는 내 영혼을 피폐의 바다 깊숙한 곳으로 격렬히 끌고 들어갔다.
다만, 날뛰는 호르몬을 쉽게 잠재울 수는 없지만, 잘 맞서 싸워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이 함께 고통에 공감해주고 동참해주어야 한다. 갱년기는 당사자만의 문제라기보다는 가족 전체가 함께 극복해야 할 문제에 가깝다. 격렬하게 변화를 겪는 와중에도 내 손을 잡아줄 이가 있다면 버틸 수 있다. 정신적으로 지치는 와중에도 가까운 이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이 시기를 잘 지나가게할 힘을 실어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의 말 한마디 말이다.
“나는 항상 네 편이야. 우리 같이 이겨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