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현 Mar 03. 2024

완벽주의라는 이름의 고문

질서 속에서도 유연하게 사는 법

 “인생은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잖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둬.”


 남편이 한참의 침묵 끝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신혼여행에서 계획에 없던 일들의 연속으로 좌절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의 신혼여행지는 멕시코 칸쿤이었다. 칸쿤에서도 가장 핫하다는 숙소에서 묵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캐리어를 보니, 바퀴가 고장나 있었다. 바퀴의 깨진 조각들이 숙소 안에 그대로 있었고, 바퀴가 남긴 흔적으로 봐서는 도어맨의 실수 같았다. 오전 내내 숙소 측과 이야기를 해봤지만, 해결되는 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시내에 나가 캐리어를 사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투어 예약이 있어서 캐리어 문제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어려운 마음을 접어두고, 투어에서 신나게 놀기로 했다. 그런데 투어 중에 물놀이를 하면서 남편이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다. 저 멀리서 남편의 신발이 둥둥 떠내려가는 게 보였다. 당시 남편은 물놀이를 한다고 안경을 안 쓰고 나와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남편이 신발을 잃어버리는 건 내 계획에 없었으므로, 나는 그 신발을 찾아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투어를 같이 하던 이름 모를 사람들이 나를 말렸지만, 나는 기어코 그 신발을 건져 왔다. 그리고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왠지 모르게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신발 한 짝이 뭐라고…


 그리고 숙소에 돌아와서, 나는 작은 포인트 하나로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남편이 눈썹 칼을 빌려 달라고 하며 가져가더니, 그만 잃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럴 수도 있다는 태도였고,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내가 가장 화난 포인트는 바로 그 태도였다. 그날 저녁, 우리는 룸서비스를 시켜놓고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이건 신혼여행이 아니라 이혼여행 같았다. 내가 기대한 하루는 이런 하루가 아니었는데. 


 부모님께 이런 류의 이야기를 나누면 내게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그냥 넘어가라”고 말하셨다. 부모님의 조언은 섬세하지 않은 것만 같아서 속상했다. 그럼 내 맘은 누가 이해해 주고, 누가 알아주나. 그렇게 나는 매번 혼자만 예민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속상한 걸 어쩌라는 것이야…


 돌이켜보면, 나는 계획이 틀어지거나, 계획에 없던 일이 발생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계획을 마치 내 임무처럼 여겼다. 완벽하게 계획대로 해내려는 몹쓸 강박으로 인해 내 삶은 나보다 내가 세운 계획이 먼저인, 주객이 전도된 삶이었다. 여기에 불안해하는 나의 기질도 한몫했다. 이 때문에 내 몸을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시도 때도 없이 두통과 복통을 달고 다녔다. 대부분의 밤을 불면으로 보냈고, 겨우 잠에 들어서도 악몽을 자주 꿨다. 계획이 틀어지면 패배감에 악몽을 꾸고, 계획이 틀어지지 않으면 언젠가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악몽을 꿨다. 


 오랜 세월 일하면서도 그랬고, 결혼 준비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인생에 존재하는 다양한 변수들은 완벽주의 계획형 인간을 지속해서 고문했다. 고문대로 끌려가는 나는 고문을 받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다가 항상 더 큰 고문을 맞이했다. 


 그래,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구나. 어느 날인가 깨달음을 얻은 나는 계획의 방식을 바꾸기로 계획했다. 그리고 이 방식은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다면, 할 수 있는 한 모든 상황을 더 통제해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서 플랜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식의 방향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계획 혁명가는 더 처절하게 고문당했다. 계획이 한번 틀어지고, 계획이 틀어졌을 때의 대안마저 틀어지고,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발생할수록 고통은 배가 되었다. 


 그리고 틀어진 계획은 이후 내 기분이나 감정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극단적으로 다 놔버리기고 회피하기도 했다. 더 이상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굴복해 버리는 것이었다. 어쩌면 아무도 고문하지 않았는데, 스스로를 계획이라는 고문대에 세워 놓고 고문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계획을 철저하게 하는 완벽주의자들은 ‘계획’하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삶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거라고. 인생을 지배하고 싶었지만, 지배당한 쪽은 나였다. 인생은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구나.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서 나는 숱하게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내 계획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팍팍하게 굴었다. 그중에서도 나 자신에게 가장 팍팍하게 굴었다. 


 신이 아닌 이상, 인생은 통제할 수 없다. 날씨, 공기, 기분, 감정, 교통 상태 등 뭐 하나 내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인생을 통제하고 싶어했던 건, 어쩌면 아담과 하와의 후예답게 무의식중에 신처럼 되고 싶어 하는 원죄의 욕구가 내 안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말했다. “신을 웃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의 계획을 말하면 된다”라고. 계획은 내가 하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것은 사실 신의 영역인데 말이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인생이 나름 계획대로 되고 있다면,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인생에 별다른 계획이 없는데도 술술 풀리는 것은, 기적이다.


 내 인생은 정상이거나, 감사이거나, 기적이거나.


 나는 아직도 아무 계획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조금 어렵다. 영화 <기생충>에서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무계획이 계획이다.”라고 말하는 가난한 아버지 캐릭터를 보면 숨이 턱턱 막혀온다. 다만, 계획을 아예 안 하기는 어렵더라도,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잘 구분할 필요는 있다고 느낀다. 무계획과 계획 사이에서 적정선을 잘 타는 것 - 그것이 질서 속에서도 진정으로 유연하게 사는 법이 아닐까. 



사진: UnsplashToa Heftib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