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기회로 삼는 사람은 더 단단해진다
예보도 없이 비가 오던 밤이었다. 꽉 붙들고 있던 감정선의 첫 자락도 예보 없이 무너졌다. 한번 감정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이후로는 도미노처럼 무서운 속도로 쓰러졌다.
평소 내 일은 독립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모님께 크게 의지하지 않는 편인데, 그날은 인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무거운 심정의 토로를 가만히 듣고만 계시던 부모님이 웃으시며 입을 떼셨다.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어.”
진지한 내 이야기에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해 주시는 부모님의 태도는 내게 허탈한 위로를 선사했다. 어쩌면 나는 이런 부류의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별거 아니라고.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실제로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해 보니 내 문제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정없이 무너져 가는 감정 도미노의 중간에서 ‘톡’하고 흐름을 끊어버리니, 눈물도 ‘뚝’하고 그쳤다. 감정이 정화된 고요한 시간이 나를 찾아왔다. 정신이 선명해졌다.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나.
성인이 되고부터 나는 줄곧 서울에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자취를 하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15년 넘게 서울에 있었으니, 이제는 서울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상하게 늘 외지인 같은 기분이었다. 이곳에서의 일상은 출근길부터 일터를 거쳐 퇴근길까지 항상 분주하고, 긴장 속에 있는 상태였다. 마치 서울에 사는 대신에 치러야 하는 대가로 도시의 위협을 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울에 살면서는 유독 힘든 일도 많았다. 직장 일도 버거웠고, 연애사도 힘들었고, 말도 안 되는 사건도 많았다. 부모님의 말처럼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넘겨 버리기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도미노를 쌓는 데에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하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내게 나쁘기만 한 일이었을까?
기억조차 하기 싫은 그때의 일을 다시 끄집어냈다. 지인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일, 강남 한복판에서 묻지마 폭행을 당했던 일, 사내 정치질에 밀려 비합리적인 평가를 받았던 일, 인터넷에서 누군가 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했던 일, 만나던 애인이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던 일, 한때는 대신 죽어줄 수도 있을 만큼 막역했던 친구가 금전적으로 사기 쳤던 일이 그러했다.
당시엔 인생에서 다신 없었으면 했던 버거운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 돌아보면,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오히려 더 단단해진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얻은 것들도 있었다. 나는 매사에 신중해졌다. 지긋지긋한 교만함도 치료했다.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도 배웠다. 그동안 감사하지 않았던 당연하고도 평범하게 주어진 일상이 사실은 아주 소중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내 삶은 시련으로 인해 보다 더 깊어졌다. 이러한 시련이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경이로웠다.
실제로 우리가 위인으로 부르는 이들 중 대다수는 기구한 환경 속에서 자라거나, 시련과 역경을 버텨낸 사람들이다. 넬슨 만델라는 반역죄로 체포되어 27년을 감옥에 있었지만, 계속해서 인종 차별에 맞서 싸웠고, 세계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스티븐 호킹은 21살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휠체어에만 의존해서 살아야 했지만, 현대 과학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오프라 윈프리는 사생아로 태어나 가난하고 학대받는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 토크쇼 진행자가 되었다.
시련으로 완성된 그들의 삶을 보면, 그 각별한 시련에 질투가 난다. 어쩌면 그토록 어려운 환경이 그들을 연단하며 더 위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큰 시련을 겪은 사람일수록 큰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나 큰 시련을 겪었다고 해서 꼭 모두가 위인이 되지는 않는다. 결국 시련의 가치는 시련을 대하는 개인의 역량에 달린 게 아닐까.
시련이 주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시련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려있다. 어떤 이들은 시련을 겪으며 주저앉는다. 어떤 이들은 시련 속에서 배움을 얻고, 시련을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인다. 후자의 사람들은 담담하게 시련을 겪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다.
과거의 내가 그토록 거부하던 시련은 사실 우리의 삶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운명과 같다. 그리고 시련을 무엇으로 승화시킬지의 선택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련을 잘 활용하는 능력이다. 물론, 막상 시련이 왔을 때, 좋은 태도를 가지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시련이 지닌 희망적인 면모는 분명해 보인다. 지나고 보면 그것이 결국 우리의 삶을 더 깊이 있게 만들며,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할 양분이 될 거라는 것 - 이제는 시련을 너무 미워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