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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Sep 16. 2023

인생은 열린 결말로 둘 것

새로운 시즌으로 돌아올 나를 기대하며

 “마케터입니다.” 10년 이상을 ‘마케터’라는 직업으로 일해오다 보니, 이제는 어디 가서 나를 소개할 때 내 이름보다 마케터라는 정체성이 먼저 튀어나온다. 이름을 이야기하는 건 간혹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어느 소속의 마케터라는 건 잘 잊지 않는다. 어느새 직업이 내 이름보다도 더 큰 정체성이 되어 버렸다. 


 오랫동안 한 분야만 파면 전문성이 생긴다는 장점이 있지만, 의존성이 커진다는 단점도 있다. 연차가 쌓이면서 연봉도 함께 올라가고, 사회에서 점점 더 인정받기 때문에 행로를 트는 시도를 하기가 어렵다. 먹고 살 걱정이 없을 만큼 돈이 많거나, 성공을 보장할 만큼의 확실한 재능을 발견했다면 모를까, 이제껏 아등바등 쌓아온 것들이 아까워서라도 자연스럽게 현실에 안주하는 쪽을 택하게 된다. 게다가 나처럼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인정 욕구도 큰 사람은 평소에도 일의 완급 조절을 잘 못하기 때문에 ‘전천후 직원’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더 가던 길에만 집착한다. 이 길이 맞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린다. 


 나는 여지껏 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고 싶다는 목표로 달려왔지만, 최근 직업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사람을 보았다. 바로 독일의 최고 철학 컨설턴트로 불리는 ‘알베르트 키츨러’다. 그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하여 수석으로 졸업했다. 같은 학교의 대학원에서는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첫 직업은 법률사무소의 변호사로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예상 범주 내에 있는 자연스러운 커리어였다.


 그런데 1년간 남미 여행을 다녀온 후, 난데없이 영화 제작자로 변신했다. 그리고 기존에 하던 일과는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영화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는 오스카상을 비롯한 각종 영화제에서 60개가 넘는 상을 받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후 그는 코르시카섬으로 떠난 도보 여행에서 다시 한번 삶의 행로를 틀었다.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던 ‘철학자의 길’을 걷기로 한 것. 놀라운 행보였다. 현재 그는 고대 지혜 학교를 설립하고, 철학을 바탕으로 한 상담, 강연, 집필 활동을 하며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를 보며 나는 라틴어 문구가 생각났다. ‘메멘토모리’.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그는 인생이 유한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후회 없이 도전하고, 자신에게 더 가치 있는 삶을 끊임없이 만들어 나가는 사람으로 보였다. 한 길만 파온 사람의 집념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계속 찾아나가는 사람은 대단함을 넘어 경외심이 들게 했다. 


 그의 삶은 멋졌고, 내게 모종의 자극이 되었다. 요즘같이 미래가 불확실하고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서 한 길만 파는 건 오히려 비효율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들어 내가 직장 생활 외에도 계속 새로운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직장인이라고 해서 계속 직장에만 매여 있어야 할까? 직장에서의 성취감은 언젠가 시들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독립성을 지닐 필요가 있다. 직장 생활을 건강하게 오래 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살짝 곁길로 새는 것이 좋다. 사이드 프로젝트로라도 조금씩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은 또 다른 자아를 찾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내 인생의 결말을 미리 정해두지 않기로 한다. 자아를 한정하지 않고, 인생을 조금 더 실험적으로 살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다음 시즌에서는 사람들에게 더 당차고 발칙하게 이야기하길 바란다. 이제야 비로소 행복하다고. 그리고 이렇게 잘 될 줄 몰랐다고!



사진: UnsplashDarran S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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