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랜 말

감정을 해치우는 방법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by 십일아

갈수록 점점 더 옅어져가는 '기억'들과는 달리 점점 더 짙어져가는 '감정'들이었다.

선명하지 않은 기억들과 선명한 감정들이 뒤섞여버렸다. 왜 이렇게 힘든 것인지, 왜 이렇게 쿡쿡 쑤시는지. 알길 없는 감정의 시작에는 기억이 있을 테니, 그렇기에 감정에 기대어 기억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간직하고 싶은 것은 웃고, 설레고, 벅찬 순간들이었지만 왜인지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그렇지 않은 순간들뿐이었다. 감정은 늘 그런 식이었다. 그런 감정들이 뿌리로 내려진 채 결국 찾아낸 기억들은 결코 원하는 것들이 될 수 없었다. 기억이란 참 슬프고 속상했다.




기억은 행복했던 순간보다 그렇지 않았던 순간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잔열은 아무 때나 상처를 들쑤시기엔 충분히 뜨거웠고, 소리 없이 다가올 때면 어김없이 그것의 영향력에 사로잡혔다. 무기력함에 말을 잃어가고, 맥없이 툭 쓰러지는 하루에 지쳐갔다.

어느 날, 아픔을 아픔으로 온전히 느끼다가 문득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안쓰러움이 깃든 연민이라기보다는, 없애버리고 싶은 지긋지긋한 곰팡이와도 같았다. 아예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미 와버린 감정이라면, 스치듯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더 깊게 자리 잡고, 오랜 시간 곁에 머물렀다. 그렇게 좁은 방 한편을 내어주었다. 언제든 오고 갈 수 있게, 제발 그 이상으로 나를 괴롭히지 않게, 보고 싶지 않았지만 잘 있는지 매일 확인도 해야 했고,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언제나 방 한편의 존재를 느껴야 했다. 밝을 때는 나의 힘이 더 강했지만 어두워지면 절대 이길 수 없었다.


먹먹해지는 감정이 다가올 때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느 때나 담담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마음을 다 잡을 새도 없이 이미 눈물은 고여있었고, 툭. 흘러내렸다. 시도 때도 없이 울컥 울컥 눈물이 차올랐고, 그저 성가신 모습에 불과할 뿐이라며 다그치기 바빴다. 왜 익숙해지지 않는 걸까. 왜 눈물을 그리 쏟아내도 후련해지지 않는 걸까. 눈물조차 나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냉정하고 차디찬 순간들이 익숙함이라는 낯익은 방패를 가져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속이기로 했다. 이 버거운 감정이 빨리 없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나의 감정은 저만치 쑤셔 넣고 몰려오는 감정을 힘껏 밀어 넣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눈물이 자취를 감췄다. 솔직하지 못해 숨어버린 눈물이 마음에 잠겼다. 깊어지는 눈물에 먹먹해진 하늘이 빛을 잃어갔다. 당황스러움도 잠시일 뿐. 그래, 분명 잘된 일이라, 이젠 담담함에 익숙해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어떤 감정에도 거짓은 없었기에 제자리로 돌아가려 움직였고, 그렇게 흔들려버린 공간은 순식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씁쓸함을 느낄 새도 없이 무너져내렸다.




웃프게도 그렇게 버리고 싶었던 눈물이 멈춰버렸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멀리하려고 애써 외면했던 기억들이 비수가 되어 꽂힐 때, 그때야 아픔을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고, 여전히 불안하다. 고스란히 남겨진 기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끊임없이 아파하고, 괴로워함에 변함은 없다.

어쩌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무너져버렸을지라도 방 한편은 다시 내어줘야 하고, 또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무너진다면 그때는 놓쳐버렸던 씁쓸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쓰고 달갑지도 않고, 심지어 싫기도 한 그 씁쓸함에는 강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감정은 빠르고 시원스럽게 끝낼 수 없는 것이었고, 방해가 된다고 없애버릴 수도 없었다. 인생은 미소 짓는 기억만 남기고 싶다고 남길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그렇다면 스스로 찾아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 기회를. 결국 함께여야 하며, 함께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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