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지 못한 마음.
중학교 입학식이었던 날, 빨리 오라던 친구의 재촉에 원래 타려던 버스 시간보다 1시간 일찍 집을 나섰다. 어젯밤부터 내리던 비는 그치지 않고 아침까지 이어졌다. 아주 추운 아침이었다. 집에서부터 주머니에 넣어놓은 핫팩이 버스정류장에 다다르자, 슬슬 뜨거워지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양쪽 주머니에 넣어놓은 핫팩을 꼭 쥐었다. 찬바람에도 쉽게 깨지 않는 잠이었다. 졸음을 쫓기 위해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얼마 안 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기."
'응?'
누가 말을 걸어왔다.
"버스 오는데."
‘뭐야, 꿈인가..’
몽롱한 정신에 눈을 꿈뻑거렸다.
"버스, 온다고."
고개를 들고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니, 어떤 남학생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응?"
"버스 온다고..!"
-끼익
꿈을 꾸듯, 남학생의 말이 메아리처럼 들리다가 버스가 멈추는 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아..!"
‘와- 놓칠 뻔했다..’
다급하게 올라탄 버스에서 아찔했던 상황을 되감으며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침부터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아- 그 남학생은..’
자리에 앉아 정신을 차리고, 아까 나를 깨워줬던 남학생을 찾기 위해서 조용히 눈만 굴리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그 아이가 보였다. 그 아이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창밖의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 나의 시선은 줄곧 창밖을 보고 있는 그 아이를 향하고 있었다.
“오늘도 일찍 가?”
“어..? 어! 다녀올게~”
엄마는 잠이 많은 내가 일찍 일어나는 것이 신기했는지, 신발을 신고 있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괜히 뭔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해야지~ 이 정돈 뭐, 할 수 있는 거니까!’
다음날,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똑같이 아침 일찍 집을 나섰지만 그 아이를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시간에 맞춰서 집을 나섰지만 역시나 만날 수 없었다.
며칠 후, 꽤 많은 비가 내리던 날, 버스에 타기 위해 우산을 접으려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고 있었다.
'어?'
뛰어오느라 흔들리는 우산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난 알 수 있었다.
그 아이였다.
"학생! 안 탈 거야?"
"아.. 아! 아니요! 타요!"
멍하게 서 있는 나를 보던 버스 기사님의 외침에 다급하게 우산을 접으며 버스에 올라탔다. 내가 타자, 곧바로 그 아이도 버스에 탔다.
"감사합니다."
그 아인 숨을 고르며 버스 기사님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때, 내게도 말을 건넸다.
"고마워."라고.
역시나 그때와 같은 자리에 앉았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 아이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애써 반대편을 바라보려고 했지만 다시 또 시선은 그 아이에게로 향했다.
3년간의 시간 속에서 그 아이는 창밖을, 난 그 아이를 바라봤다.
박도현을 처음 보게 된 건 버스정류장이었다. 그때 나를 깨웠던 희미한 목소리가 지금은 선명하게 남아 여전히 나를 깨우고 있다. 말을 해본 거라곤 그때뿐이었다. 그러나 대화도 아닌 그 대화가 참 깊게 내게 새겨졌다. 비가 오는 날, 눈이 내리는 날에는 버스를 타던 아이.. 난 비 오는 날도 눈 내리는 날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를 알고 나서부터는 왜인지 비 오는 날을, 눈 내리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좋아하게 됐는지는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냥, 어느 순간 내 마음속에 그 애가 들어와 있었다. 음.. 아마 내 첫사랑의 시작은 궁금증이었던 것 같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쳐다보게 되다가, 기다려지다가, 그러다 같은 버스에서 만날 때면 벅찬 마음을 안고서 하루를 보냈다. 문득 지민이가 내게 설레는 얼굴로 말해주던 짝사랑 이야기가 와닿았다. 그리고 그때, 알 수 없는 이 감정이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넓은 강당을 가득 채운 학생들 사이로 도현이가 보였을 때, 당장이라도 다가가 혹시 나를 기억하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 마음을 사그라뜨렸다. 그럴 용기는 없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깨닫고 나서 처음 보는 도현이었기 때문에..
아주 찰나였고, 알고 지낸 것도 아니었고, 가끔 버스에서 마주치던 사이. 그뿐이었다. 언제 좋아하게 됐는지, 왜 이렇게 오래도록 좋아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좋아하는데 뭐 그리 많은 말들이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