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ella Jan 04. 2019

남성에게도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주위에 선언한 이후, 많은 남성들은 내게 본인이 생각하는 페미니스트의 이미지가 "귀에 대고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짜증 나는 여자"라고 했다. 단순히 미디어와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백래시 때문일까? 혹은 본인들은 성차별과 관계가 없고 페미니즘은 오직 여성들의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페미니즘 혹은 양성평등은 성과 나이, 지위, 국가와 인종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필요하다.


이제는 '자유'와 '개인주의'의 상징이 되어버린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미국은 생각보다 보수적이다. 남자는 어때야 하고, 여자는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고정관념이 한국을 넘어서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사회가, 또 개인이 남성에게 투여하는 '진정한 남자'의 이미지는 많은 미국의 남성들을 아주 어린 나이부터 해치고 있다. 터프한 남자는 울지 않고, 운동도 잘하며, 사교적이고, 계집애처럼 징징대지 않으며,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해선 안되고 성인이라면 해 뜰 때까지 술을 마실 수 있는 강철 같은 간 또한 갖춰야 한다. 이건 아주 소수이고 그밖에도 남자에게 많은 사회적 제약과 기대치가 따라온다. 감정 표현을 마음껏 하지 못하고, 계집애들이나 하는 놀이가 아닌 '터프한' 장난감을 가지고 논 남자아이들은 사회가 주입한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인 성관념에 의해 자연스럽게 여자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  여자는 약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 징징대고, 예민하고, 짜증 나고, 드라마틱하고 가십을 좋아한다는 것  을 갖게 된다. 이는 자연스레 여성 혐오와 차별로 이어지고, 곧 그 화살은 그들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미국 남성은 평생을 걸쳐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하다. 학창 시절에는 게이나 너드로 놀림받지 않기 위해, 성인이 되어서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여자를 많이 만나기 위해서 끊임없이 여성을 소비 및 비하하고 남성성을 추켜 세운다. 학교 내에서 말이 많거나 섬세하면 여자 같다며 남자아이들끼리 서로 왕따를 시키는 건 가부장제가 남성에게도 얼마나 해로운지 보여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남자아이들이 맨박스에 갇혀 고통받고 있다. 젠더 고정관념은 여성들에겐 코르셋을 입히고 남성들에겐 감정적으로 무감각하라고 가르친다.


가부장제와 성별 이분법적인 사고를 탈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여성과 성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왼: 영화 <The Wolf of Wall Street>      오: Blurred Lines by Robin Thicke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


사회와 미디어는 이러한 왜곡된 남성성을 부추기고, 여자와 권력을 갖는 것만이 성공의 척도이자 인생의 전부인 듯 말한다. 성공한 남성들에게 있어 아름다운 여성이란 집에서 육아를 도맡아 해 줄 트로피 와이프, 혹은 하룻밤을 지낼 창녀로만 인식된다. 여성성은 남성의 그것보다 열등하다는 잠재된 생각 때문이다.


아무리 잘난 남자라도 여자 친구가 없거나, 미혼이라면 뭔가 부족한 사람, 어딘가에 하자가 있거나 게이일 거라는 사회적 편견이 이를 반증한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은 성공한 남자가 쟁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마지막 트로피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대상화시키는데 어릴 때부터 학습되어온 남성이 페미니스트로 성장할 확률이 몇이나 될까?


물론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Real Men Don't Buy Girls>는 데미 무어와 애쉬튼 커쳐가 설립한 단체, 'The Demi and Ashton Foundation (DNA)'에서 아동 성매매를 반대하기 위해 주도한 캠페인이다.



할리우드의 유명 셀럽들이 '진짜 남자는 여자아이들을 사지 않는다'라는 피켓을 들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이 사진들은 소셜 미디어를 타고 전 세계로 퍼졌다. 이 캠페인은 얼핏 보면 인신매매 및 성매매에 착취되는 어린 소녀들을 보호하기 위한 멋진 남자 어른들의 모습 같지만 여기에도 서양의 마초 콤플렉스가 녹아있다. "진짜 남자 (real men)는 ~해야 한다."라는 명제가 그것이다. 이는 보기 좋게 포장했을 뿐 또 다른 종류의 남성성에 대한 강요이자 폭력이다. 진짜 남자라서가 아니라 그 대상이 누구든 인신매매와 성매매는 해서는 안될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또한, 남성이 주 가해자인 성매매를 남성들이 캠페인의 주체가 되어서 반대한다는 게 왠지 모르게 아이러니하다. 이는 서양의 기사도 정신과 맞닿아 있는데, 여성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또다시 여자를 약자에 놓고, 그 우위에 서려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수도 없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서양의 백마 탄 왕자님이 그러했고, 동양엔 유교의 가부장제가 그랬다. 어릴 때부터 학습된 '여자는 남자의 보호 없이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고정관념이 또 한 번 드러나는 순간이다. 인신매매와 성매매는 우리 사회 모두가 (성과 지위를 막론하고) 나서서 없애야 할 산업이지, 내가 '진짜 남자'이기 때문에 혹은 그를 증명하기 위해서 선민의식을 갖고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여느 사회 운동이나 그렇듯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2018년 한국을 뜨겁게 달궜던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의 시위처럼,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더욱 불편해져야 하고, 예민해져야 한다. 페미니스트의 이미지가 시끄럽고, 짜증 나는 히스테릭한 여자인 이유도 그렇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회가 정해준 관습에 따라 차려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채 얌전히 앉아서 예쁜 말로 온종일 설득해서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사회 각계층의 개개인이 불편해하면 결국 그 목소리는 나비효과가 되어 가정으로, 학교로, 또 법을 제정하는 입법부로 퍼져가 개혁의 토대가 된다.


가부장제를 붕괴하고, 여성들이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남성들은 맨박스를 벗어날 때 우리는 온전히 '나'로써의 삶을 살 수 있다. 누군가가 정해주고 학습된 것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 갖고 놀고 싶은 장난감, 입고 싶은 옷, 듣고 싶은 음악, 마시고 싶은 술. 우리는 사실 모두 알고 있고 원하고 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여성성을 비하해야만 남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는 이제 끝내야 한다. 여성 혐오의 원천인 남성을 배제하고서는 이갈리아도 없다. 많은 여성들이 코르셋을 벗어던지는 바로 지금, 남성들도 사회가 가둔 맨 박스에서 나올 차례다.





추천 자료


<이갈리아의 딸들>. 황금가지. 1996. ISBN 978-89-8273-000-9.

<맨박스,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저, 김영진 역, 한빛비즈, 2016, ISBN 9791157841387

토니 포터: <남자들에게 고함(Tony Porter: A call to men)>, TEDWomen 2010

<The Mask You Live In> (2015), Jennifer Siebel Newsom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문학동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창비, 2016








매거진의 이전글 脫 코르셋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