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는 미디어의 남성 포화가 싫다
미국의 작가, 코미디언이자 운동가인 린디 웨스트는 그의 책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에서 "어떤 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아가는 기나긴 과정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고 말했다. 그만큼 페미니즘은 내 삶의 많은 곳에 영향력을 끼친다.
페미니스트(+프로 불편러)가 된 후, 나는 넷플릭스에서 볼 만한 콘텐츠를 브라우징 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백델 테스트를 통과할 만큼은 바라지도 않지만 남자가 8-90%를 차지하지 않는 영화나 드라마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남성이 주인공이 되어 남성 조연자들과 함께 남성의 얘기를 하는 작품은 수도 없이 많은데 여성 서사는 고사하고 여성이 스토리의 주된 인물로 나오는 영화는 아주 적다. 여성이 주연으로 나온다 한들 주로 그 작품은 로맨스 코미디일 확률이 높고 이는 남자 상대역이 필연적으로 출연함을 의미한다. 여자 배우들은 연기를 못해서? 여성 서사는 재미가 없고 안 팔려서?
아니, 권력 구조 때문이다. 방송 업계도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다. 김기철 기자는 매일경제의 칼럼에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산소 같은 존재다. 위로 올라갈수록 존재가 희박해진다는 면에서 그렇다."라고 말했다. 권력을 잡고 있는 집단이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파는 거다. 딱히 그게 더 잘 팔려서도, 그 배우들이 더 뛰어나서도 아니라.
요새 유행한다는 쿡방만 봐도 그렇다. 스타 셰프라는 사람들은 죄다 남자다. 왜?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셰프가 갖는 위치 때문이다. 레스토랑은 작은 기업이고 셰프는 그 중심에 서있다. 권력 구조의 상위층에 속한 셰프는 자연스레 남성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레스토랑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요리는 여성의 몫이 된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정할 필요도, 따질 필요도 없다. 당연히 여자라면 해야 할 미덕인 것이다. 셰프는 돈과 명예라도 얻지, 집에서 아무 대가 없이 하루 종일 삼시 세끼 가족들의 밥을 챙겨 먹이는 여자들은 홀대하고 천시하면서 티비에 나오는 남성 셰프들은 띄워주고 박수 쳐주는 건 이제 불편함을 넘어서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맥락으로는 육아가 있다. 한국 남성의 육아 참여율은 이슬람 국가 수준인 16%다. (맞다, 그 히잡 쓰고 다니는 곳. 그중 사우디아라비아는 2017년이 돼서야 여성에게도 운전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줬다.) 그럼에도 티비 육아 예능은 아빠 추켜세우기에 여념이 없다. <아빠 어디 가>, <슈퍼맨이 돌아왔다>, <아빠 본색>, <우리 아빠가 생겼어요> 등, 티비에서는 엄마였다면 시청자 게시판이 악플로 도배됐을만한 실수들도 ‘아빠’라서 서툴고 귀여운 해프닝으로 포장된다. 어린아이를 가진 엄마들이라면 누구나 만드는 이유식을 ’아빠’인 봉태규가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온 미디어가 들고일어나 찬양한다. 잘못은 축소시키고, 사람이자 부모라면 마땅히 해야할 일은 아주 크게 포장하는 게 엄마가 어릴 적 오빠와 나를 차별하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 물론 이로 인해 육아와 요리는 여자만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바뀌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가정 밖에서의 여성이 설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화나 드라마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남성 주연의, 남성만 나오는 영화를 보지 않겠다 말하면 주변 남자들은 날 유난스럽고 까탈스러운 여자 취급하며 입을 삐죽 댄다. 당연히 금발 백인 남성 주인공만 보고 자란 그들에게는 뭐가 이상한 건지 이해가 안 되겠지. 이건 남자들이 딱히 여자들보다 공감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만큼 그들에겐 이것이 'norm' 즉,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회사에 가고, 엄마는 집에서 가사를 하는 것. 기업의 임원과 국가 고위직에 남성이 자연스레 1순위로 채용되는 것. 영화에 남자 주인공이 나와 여자 조연을 구해주고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 우리는 이 모두가 당연한 사회에 살고 있다. 남자 조연, 여자 주연인 (혹은 아예 역할마저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
가끔 나는 내가 제1세계 국가에, 금발 벽안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고 생각한다. 내가 동양의 작디작은 나라에서 여성 차별을 뼛속까지 받으며 자란 여성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나도 그들처럼 내 입으로 떠먹여 주는 특혜를 온전히 받아먹으며 특권 의식이라는 넓은 풀장을 유유히 떠다녔겠지. 한 손엔 플레이 보이 매거진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여성의 머리를 수면 아래로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1. 제1세계에서 태어난 백인도 2. 남성도 아니므로 남자가 하는 모든 것을 숭배하고 찬양하는 이 사회의 풍토가 싫다. 여자들을 수면 밑으로 짓누르고 저들끼리 하하 호호하는 알탕 연대는 더 싫다. 이 글이 혹 그대를 짜증나게 한다면, 알탕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또한 특권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난 당신이 진심으로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