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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준 Oct 28. 2020

백신은 어쩌다 두려움과 걱정거리가 되었을까

리스크 관리의 역설


예전에 리스크에 관해 배울때 유능한 리스크 관리자가 무능한 사람이 되는 역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장 유능한 리스크 관리자는 사전에 미리 잘 대처하여 사고가 발생할 일이 없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고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사람의 일은 과소평가 받거나 혹은 쓸모 없는 일로 여겨지게 된다. 사고를 사전에 막기 위한 조치들은 사고가 일어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불편하고 쓸모없고 비용만 발생시키는 일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닌 말처럼 뭔 일이 터진 적도 없으니 이 유능한 리스크 관리자가 하는 행동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유능한 사람은 아무 일도 터진적 없는데 쓸데없는 일거리와 조치를 늘려나가고 자리만 차지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평가받게 된다.


어떠한 일을 사전에 대비하여 발생 확률을 줄인다는 것에 대한 인식의 어려움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데 백신이 하는 역할도 이와 유사하다. 백신은 감염병의 확산이란 리스크를 아주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이게 너무 효과적이다보니 그 역할과 능력이 가면 갈수록 과소평가되고 있는 걸로 보인다.


그래서 이번 매경 컬럼에선 백신에 대한 평소 생각과 사람들의 이러한 인식에 대해 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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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우리는 질병 대신 백신을 걱정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을까.


홍역, 인플루엔자, 콜레라, 티푸스, 장티푸스, 천연두, 페스트, 폐렴 등 질병은 하나같이 과거엔 걸리면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음에 이르렀던 질병이었다. 그리고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다양한 후유증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질병으로부터 현대인들이 비교적 안전해진 것은 위생과 의학의 발전 덕분이다. 백신은 이 의학의 발전에서 나온 산물이며 그만큼 기여도가 높다. 의학의 발전으로 사망자를 줄일 수 있었으며 위생 관념의 등장과 백신으로 감염자 자체를 매우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왜 현대에 백신을 걱정하고 불신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흔히 대형 사고를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유능한 리스크 관리자는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힘들다고들 이야기한다. 만약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하기 이전에 어떤 관리자가 항공기 납치 테러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공항과 항공기 보안을 강화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테러 발생은 사전에 막을 수 있었겠지만 역설적으로 테러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용객들과 공항, 그리고 항공사들은 이러한 조치를 불편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뛰어난 관리자가 사전에 발 벗고 나선 덕에 위기 발생을 막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위기가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위기를 막기 위해 한 그 모든 조치가 불필요하고 과도하며 비용만 발생시켰다는 비판을 받지 않았겠나. 유능한 리스크 관리자가 무능한 관리자가 되는 역설이다.


백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이와 비슷하다. 백신의 등장으로 인간은 수많은 감염병에서 해방됐다. 한편으로는 백신이 매우 효과적으로 질병의 위험을 차단했기 때문에 질병이 가진 위험을 잊거나 과소평가하게 됐다. 백신이 질병의 위험을 너무나도 효과적으로 관리한 결과 백신의 효과는 잊어버리고 부작용을 더 크게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코로나19의 범세계적 유행이 잘 보여주듯이 백신이 존재하지 않는 전염성 높은 질병은 우리 일상을 언제든 마비시킬 수 있다. 20세기에 백신이 등장한 이후로 질병 발병률이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기에 우리가 잊고 사는 것뿐이다. 백신이 없었다면 올해와 같은 생활을 전염병이 돌 때마다 끝도 없이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 점에서 백신에 대한 불신과 걱정은 위에서 언급한 유능한 리스크 관리자의 역설과도 같다.


백신에 대한 불신과 거부 운동이 선진국에서 벌어지고 고소득층과 고학력층 참여 비중이 높다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백신이 저개발 국가에서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 있지만 선진국의 고소득·고학력층은 백신이 가져온 축복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그것을 거부하는 행위야말로 선진국 국민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사치가 아닌가 한다.


백신은 20세기 대량 생산 체제가 만든 가장 위대한 상품 중 하나다. 대량 생산 덕에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안전한 현대사회의 기반을 만들 수 있었지만 저렴하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상품은 소비자에게 늘 저평가받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 백신 접종 비용이 매우 비싸고 대기해야 할 정도로 공급이 부족했다면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았을까. 가격이 비싸고 안전성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치료법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몰리는 현상을 보면 대강 짐작이 간다.


사실 이런 모습은 소비 시장에서 매우 쉽게 목격되는 현상이다. 백신은 이에 더해 일어나지 않은 사건에 대한 과소평가가 더해진 경우다.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을 막는 일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리스크 관리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오류 중 하나다. 인류 역사상 손꼽힐 훌륭한 발명품인 백신이 생산성과 효능 양쪽 방면으로 너무 훌륭해서 외면받고 있는 현실이 시장을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https://www.mk.co.kr/opinion/contributors/view/2020/10/1090746/?sc=3050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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