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거의 모든 회사들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기점으로 긴 휴가를 들어간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짧게는 2주 정도 길게는 한 달 동안 긴 여름휴가를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강제로 회사가 문을 닫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선택권이 없다.
가족들과 고국 방문을 하거나 아니면 특별한 여행을 가는 경우에는 상관없지만 특별한 여행 계획이 없는 직원들은 평소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연차를 회사가 강제로 청산(?)하기에 불만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이런 강제 휴가가 직원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쉬어야만 또 긴 한 해를 잘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작년이랑 재작년에 고국 방문을 많이 해서 올해는 특별히 연말에 여행 계획이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말 그대로 온전한 쉼을 가져야겠다고 진작에 계획하고 있었다. 쉬는 동안 밀렸던 독서와 평소에 가고 싶었던 카페에 가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여유를 즐길 생각이었다.
작년 브런치 작가가 되고 짧은 시간 동안 2권의 브런치 북을 쓴 후 알게 되었던 것이 글을 많이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들이 쓴 글을 많이 읽을수록 글쓰기가 한결 더 편안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꾸준히 운동을 하면 매일매일 운동가는 것이 힘들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이번 연휴 동안에는 뭔가 내 글을 쓰기보다는 남의 글들을 최대한 많이 읽어야겠다고 맘먹고 있었다. 다행히 쉬는 3주 동안 4권의 책과 브런치에 올라오는 글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 영감으로 올해도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올리는 습관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기획자들은 일 욕심이 많은 편이다. 완벽주의자들도 많다. 계획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성격의 기획자들도 많이 봤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획자들은 꿈을 많이 꾼다. 이런저런 곳에서 듣고 보고 배운 것들 중에서 흥미로운 것들을 최대한으로 플랫폼에 적용해 보려고 하는 시도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럴 때마다 늘 개발팀과 충돌이 발생한다. 개발팀은 실체를 만들어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늘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들만 수용하려고 한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한때 그들의 입장에서 일을 해 본경험이 있는지라 더 그들의 고충을 잘 알고 그래서 그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하려고 하는 편이다.
작년 11월에 새로 맡은 플랫폼은 말 그대로 안갯속이었다. 뭐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하나 모든 것들을 미리 검증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든 것들을 다 확신을 가지고 제품 개발을 시작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파트는 가능한 사전 검토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진행하다가는 팀을 너무 힘든 상황에 빠지게 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기획 과정에서 오픈 소스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오픈 소스들 중에는 유료 라이선스를 구매해야 하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 많은 오픈 소스들은 무료 사용이 가능하다. 이런 오픈 소스를 사용하면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맨땅에 헤딩하지 않고 어느 정도 기반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치명적인 단점은 선택한 오픈 소스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서비스는 10년 20년 아니 더 오래갈 수 있는데 오픈 소스는 언제 단명할지 모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오픈 소스 사용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 플랫폼은 기술적 난이도로 인해 팀이 협의한 끝에 오픈 소스를 쓰기로 하고 시작했다.
1차 프로토타입 과정을 통해 4개의 오픈 소스로 축약되었고 2차 검증을 통해 그중에 하나의 오픈 소스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기술적인 디테일을 알지 못하기에 전적으로 개발팀에 의존했다. 하지만 진행하면서 계속 머릿속에 "왜 우리가 직접 만들면 안 되지? 가능할 것 같은데...."라는 의문이 계속 들어서 구글을 통해 서치를 해서 이런저런 콘텐츠를 읽고 조사를 했는데 찾는 정보가 없었을 뿐 아니라 깔끔하게 정리된 것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챗GPT를 통해 물어보기로 하고 오픈 소스를 사용하지 않고 자체 개발을 통해서 개발이 가능한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정말 깔끔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알고 싶었던 내용들을 꼭 집어서 답변을 해주었다. 새삼 AI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AI에 관한 글은 다음에 별도로 글을 쓸 예정이다.
아무튼 ChatGPT의 답변을 보고 나는 거의 확신을 가졌다. 오픈 소스를 안 쓰고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당장 다음날 개발팀을 회의실로 불렀고 정리된 내용을 공유했다. 말 그대로 내가 한 것은 전쟁 선포였다. 개발팀은 방어하고 나는 공격하고. 몇 차례의 미팅 끝에 결국은 나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패자는 말이 없어야 한다. 개발팀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하고 더 이상 논의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긴 연말 휴가 시작하기 전의 일이었다.
연말 휴가 기간 동안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개발팀 직원 한 명이 있어서 숙제를 던졌다. 3주 동안 우리가 선택한 오픈 소스를 더 분석하고 최종 테스트 하기로 했다.
지난주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나는 그 직원에게 연락을 했다. 최종 테스트 결과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것보다는 팀장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연락을 했다. 점심 먹고 들어 왔더니 그 직원으로부터 이메일이 와 있었다. 그런데 그 이메일을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너무 오래 휴가를 갔다 와서 적응이 안 돼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건가 잠시 헷갈려했다.
그 직원의 답변은 이랬다. 오픈 소스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문제가 많았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수정이 필요한데 수정하는 그 자체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직원은 중간에 방향을 틀어 내가 말한 대로 자체적으로 제작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힘들고 오래 걸릴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막상 해보니 가능했고 오픈 소스에 의지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했다. 테스트는 거의 마지막 단계이며 앞으로 추가로 2주 정도 더 작업을 하면 데모할 수 있는 형태로 완성이 가능할 것 같다고 이메일을 마무리했다.
당장 팀장과 팀리더들을 호출하고 그 직원을 같이 초대해서 온라인 미팅을 했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듣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실체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3주 휴가에서 돌아온 첫날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직원은 이메일에 요약한 것을 다시 확인해 주었고 실제로 동작하는 애플리케이션을 간단하게 데모로 보여주었다.
중간에 팀장이 나한테 메신저로 개인톡을 보냈다. "이거 혹시 네가 원했던 것 아냐?"
내가 답변했다. "맞아. 바로 이거지!!!"
미팅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죄다 놀랬고 그 짧은 시간 내에 그걸 증명한 그 직원의 능력에 또 한 번 더 놀랬다. 다들 돌아가면서 그 직원의 작업과 결과에 대해서 칭찬하고 그리고 흥분했다.
그 직원이 미팅 마직막에 자신도 오픈 소스를 반드시 사용해야 할 프로젝트라고 생각했고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고집을 부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오픈 소스의 문제점들에 하나씩 부딧치면서 짜증이 나면서 현타가 왔다고 했다. 그러다가 내가 제안했던 방식이 생각이 났고 시도를 해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 방식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전 미팅에서 자신의 한쪽으로만 바라본 것에 대해 후회를 했다고 말했다.
새해 첫 출근날부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들려온 굿 뉴스로 인해 팀장도 나도 모두 다 흥분했다. 좋은 에너지를 받아서 너무 기뻤다. 물론 아직 가야 할 길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가장 큰 고비를 넘긴 것 같아서 부담이 좀 줄었다.
생각해 보면 당시 개발팀과의 미팅에서 내가 나의 의견을 더 강력하게 계속 주장할 수도 있었다. 물론 나의 100% 확신이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그 순간에 개발팀을 너무 힘들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개발팀을 더 믿었다. 그들은 분명 나보다는 더 전문가들이고 설령 나쁜 선택을 했다고 해도 결국엔 나는 그들에게 의지하면서 이 제품 기획과 개발을 이끌어 나가야 하기에 나의 날카로운 칼을 빨리 접었다.
하지만 그들도 그 토론의 과정 중에서 뭔가 한쪽 구석에서는 나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던 부분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그 직원이 배의 선수를 다른 방향으로 과감하게 돌릴 수 있었던 것이지 않았던 것일까 생각해 봤다. 무엇보다도 솔직했던 그 직원으로 인해 마음이 무척 좋았다.
그러면서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지는 것이 결국은 이길 수도 있겠구나. 너무 나의 고집만 부리기보다는 타인의 의견을 더 들어주고 그들의 논리를 더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야겠구나.
다음날 아침 이메일을 열어보니 아침 일찍부터 팀장이 보낸 메일이 맨 먼저 보였다.
팀장은 그 직원과의 미팅이 끝난 후에 작년에 내가 이메일로 요약해서 보낸 나의 제안에 대한 이메일을 다시 읽어봤다고 했다. 그 이메일에 다시 답장을 달고 이렇게 보냈더라.
Did you have a crystal ball, Brian?
의역하자면, "어떻게 그렇게 예측할 수 있었어?" 쯤 된다.
팀장이 내가 결국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 아니 무슨 예지 능력이 있는 것 아니냐 라는 농담을 한 것이었다. 아침부터 그 이메일을 보고 참 많이 웃었다.
올해는 너무 내 욕심만 부리지 말고 지면서 이기는 일들을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좀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