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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M Dec 16. 2024

두 개의 바퀴

최근에 팀에 새롭게 들어온 프로덕트 매니저가 있다. 편의상 A라고 호칭하겠다. 이제 막 6개월이 지났고 여전히 적응 중이다. 짧지만 그동안 옆에서 지켜본 대로라면 A는 아직 별 탈이 없이 팀에 잘 적응하고 다른 팀 사람들과도 문제없이 잘 협력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최근 팀 매니저로부터 이상한 이메일 하나를 받았다. 그 이메일은 매니저의 정중한 요청에 관한 것이었다. 내용인즉 시간이 되면 A와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얘기를 좀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제품 개발팀과의 협업과 관련된 경험담과 몇 가지 노하우를 A에게 좀 공유하면 어떻겠냐는 것도 함께 덧부쳤다. 


그 이메일을 받고 한동안 생각이 많았다. 왜 이런 이메일을 나한테 보냈나? 솔직히 A와 나는 팀 내에서 상하 관계도 아니다. 그냥 동료일 뿐이다. 그 말인즉은 내가 A를 만나서 그런 얘기를 하고 뭔가 조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약간은 선을 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짧은 문장들을 읽어보고 또 읽어보고 했다. 혹시 내가 눈치채지 못한 행간의 의미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니면 메신저로 연락을 해서 도대체 무슨 말이냐 왜 이런 메일을 보냈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왠지 이번에는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이메일에서 보스의 정중한 부탁과 약간의 걱정이 느껴졌다. 




며칠 후 A에게 일단 간단하게 미팅을 할 수 있는지 메신저로 연락을 했고 괜찮다고 해서 금요일 오후 늦은 시간에 온라인 미팅을 하기로 예약했다. 특별히 금요일 오후에 미팅을 잡은 이유는 그 시간이면 대부분의 직원들이  주중에 가졌던 긴장을 살짝 풀고 마음이 좀 더 늑늑해지기 시작하는 시간대라서 편하게 이야기하기 좋아서였다.  


미팅 시간이 다가왔고 화상 회의실로 접속했다. 늘 언제나 비슷하게 간단하게 날씨 이야기며 이번주는 어땠는지 그리고 주말에 뭔가 특별한 계획이 있는지 등등 수다를 좀 떨면서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그러다가 내가 먼저 툭하고 던졌다. "So, is everything going well?"


A는 눈치가 빨랐다. 그 질문에 바로 내가 왜 연락을 했는지 알아챘다. 자연스럽게 A도 마음을 열고 지난 6개월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좋았던 점과 힘들었던 것들을 마구 쏟아내었다. 그 수많은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어주고 물론 어떤 것들은 동의도 하고 어떤 부분들은 몇 가지 나의 의견이나 제안도 하면서 이야기를 잘 이어갔다. 좋은 대화였다고 말하고 일단 미팅은 끝났다.  


알고 보니 A는 대학에서 마케팅과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Product Management 관심이 생겨서 이쪽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처럼 공대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나 시스템 분석이나 설계 등의 기술 기반의 커리어를 통해 PM 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강점은 마케팅과 고객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프러덕트 세이즈 지원 등이라고 말했고 자신은 한 번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공부해 본 적도 없으며 그래서 기술적인 지식 그리고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쉽게 말하면 A는 문과생이었고 나는 이과생이라는 것이다. 나와는 정반대 편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지금 똑같이 프러덕트 매니저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난 6개월 동안 A는 개발팀과 제품 개발에 관련된 기술적인 미팅을 하거나 이슈가 발생해서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 있어서 전적으로 개발팀의 인사이트와 그들의 디자인에 의존하고 개발 진도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맡긴 모양이었다. 대신 자신은 고객과의 접점에 더 가까이 가서 제품의 가치를 설명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고객에게서 들은 제품의 피드백을 개발팀에 다시 전달하는 것에 더 집중했던 것이었다.  


그런 A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 나의 매니저는 좀 다른 의견이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A가 입사하기 전까지 나와 매니저는 이미 지난 10년이 넘게 오랜 기간 일하면서 나름대로의 우리 팀의 역할, 가치 그리고 우선순위와 KPI등에 대해서 정의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일을 해 왔었다. 물론 그것들은 내가 이미 팀에 들어오기 전부터 매니저가 정한 것들이었고 나는 별 의문 없이 그 룰(?)대로 지금까지 일을 해 왔었다. 사실은 매니저가 원하는 방향이 나에게는 더 잘 맞는 방식들이었다.  그런데 A는 팀에 들어온 후 그런 것들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way를 정의하고 그것대로 진행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약간의 충돌이 생겼고 매니저는 나를 통해 뭔가 조율을 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A와 긴 대화를 하고 나서 느낀 것은 A는 아마도 '프로덕트 마켓터' (Product marketer)라는 옷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과 강조했던 영역들은 대부분 마켓터들이 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것이 어쩌면 새로운 트렌드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PM 커리어를 막 시작했던 20년 전쯤에는 대부분의 PM들은 개발자 출신 아니면 아키텍트 배경을 가졌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에 문과를 졸업하고 PM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하다 못해 학부는 문과를 졸업했었더라도 대학원에서 이공계 쪽을 전공을 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뉴스나 링크드인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PM관련 온라인 커뮤니티나 캐치업 미팅을 나가보면 의외로 비공대생 출신들이 제법 보인다. 최근 들어서 미국의 스타트업 회사에서는 젊은 PM들이 기술 백그라운드가 전혀 없고 오로지 커뮤니케이션 스킬만 가지고도 제품 기획을 하고, 팀을 더 잘 리드하고, 개발 및 론칭까지 훌륭하게 진행한다는 블로그 글들은 많아 봤다. 그리고 솔직히 개인적으로도 프로덕트 매니저는 반드시 공대생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매니저와 나는 구식(old school)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늘 생각했던 프로덕트 매니저의 이미지는 좀 더 제품 개발과 딜리버리에 더 충실하고 신규 제품을 원하는 스케줄에 맞게 론칭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라고 생각하면서 일해 왔었다. 하지만 A의 생각은 그것도 중요하지만 고객을 더 이해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바로바로 적용하고 그들을 만족하게 하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다. 틀린 말이 절대 아니다. 고객이 없이 어떻게 제품이 존재할 수 있는가? 


나와 매니저는 A가 팀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A가 팀에 들어오면 내가 2년 동안 기획해서 만든 플랫폼을 인수인계하기로 했었다. 솔직히 그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다. 그 플랫폼은 우리 회사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그리고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을 했던 정말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는 프로젝트였기에 개인적으로 애착이 많이 있었다. 그 플랫폼 개발 기간 동안 처음 1년 동안 나는 개발팀과 수없이 많은 기술 미팅과 워크숍을 해야 했었고 비록 엔지니어는 아니었지만 나 자신도 기술에 대한 인사이트를 위해 시간과 열정을 마구 쏟아부었다. 그 노력의 결과였을까 불가능할 것 같던 것들이 눈으로 보이게 되고 결국엔 2년 만에 시장에 출시하고 고객이 생기게 되었다. 다행히 제품이 성공적으로 완성되고 론칭이 되고 초기 고객도 확보해서 이제는 주기적으로 업그레이드만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A가 적응하는 동안 그 일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맡기기로 했던 것이다. 




아무튼 A와의 대화 후에 나는 일부러 매니저에게 대화 내용을 바로 공유하지 않고 A에게 좀 더 시간을 주고 멀리서 바라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A는 점점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었고 어느 순간 매니저도 점점 벽을 지워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제는 공유를 해도 되겠다 싶었다. 최근에 회사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매니저와 맥주를 한잔씩 기울이면서 슬쩍 A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매니저도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궁금했는지 조용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몸을 나에게 기울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는 매니저에게 우선 자전거 이야기로 시작했다. 예전에 바퀴가 하나인 자전거 도전한 적이 있었는데 언제든지 넘어지기 쉽고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도 느려서 별 재미가 없어서 바로 그만두었다. 하지만 두 바퀴로 달리는 자전거는 일단 안전하고 균형도 잘 잡히고 무엇보다도 더 빨라서 재미도 있었고 실력도 빨리 늘었다고 말했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고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두 바퀴로 움직이니까

자전거 이야기 후에 매니저에게 나와 A의 다름을 강조했다. 나의 강점이나 장점은 A의 그것들과 다르고 그래서 어쩌면 A는 우리 팀에 다른 가치를 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새로운 기술들을 적용하고 혁신을 하기 위해서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생기면 내가 맡아서 하면 되고 그것들이 완성되어서 시장에 나가서 고객들 더 잘 사용할 수 있도록 가꾸고 그들의 사업에 맞춰서 제품을 수정하는 것들은 A가 누구보다도 더 잘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당신(매니저)은 이제 두 개의 바퀴가 돌아가는 자전거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태 하나의 바퀴에 의존해서 불안했고 더 빨리 나아가지 못했다면 앞으로는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줬다. 한참을 듣고 난 후 매니저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그리고 다 동의한다고 그랬다.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A가 불안하고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믿어보자고 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최근에 A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고객들에게 제품에 대한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고 했으며 매니저도 이제는 A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 인정하는 듯한 답장을 보냈다. 다행이고 잘됐다 싶었다.


사실 A가 일하는 방식과 그가 생각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어쩌면 그가 하는 것이 결국에는 우리가 가려고 하는 종착역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내부에서 제품을 기획하고 개발하는 것에 모든 열정을 쏟아붓지만 결국엔 고객이 중요하고 그들을 더 이해해야 하고 그들을 위한 제품을 만들어야 팔리고 더 사용자가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까먹고 지금 당장 만들기에 집중하곤 한다. 고객이 없는 제품은 앙꼬 없는 찐빵이나 같은 것을. 역시 고인 물은 썩는 다고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10년을 같은 패턴으로 일했던 나 자신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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