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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M Dec 02. 2024

The first round

매년 새해 1월이 되면 호주 멜버른에서 큰 스포츠 행사가 열린다. 바로 전 세계 테니스 경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4대 그랜드 슬램 대회 중에 하나인 Australia Open이다. 


2008년 호주 시드니로 온 이후로 매년 한 번도 안 빠지고 이 경기를 보고 있고 두 번 정도는 직접 경기장에 가서 직관을 한 적도 있었다. 아내는 원래 좋아하지 않았지만 호주에 살면서 좋아하는 스포츠가 되어버려서 이제는 웬만한 테니스 선수들은 나만큼 잘 안다. 


우리는 로저 페더러, 나파엘 나달, 노박 조코비치, 그리고 앤디 머레이 이렇게 4대 천왕들이 테니스를 장악했던 세대다. 이들은 그랜드 슬램 대회를 번갈아 가면서 챔피언이 될 정도로 서로가 경쟁하면서 성장해 갔다. 그들의 우승 경력은 대단하다. 그랜드 슬램 대회를 제외한 나머지 투어 대회까지 포함하면 어머 무시하다. 가끔씩 아내와 경기를 보면서 그랬던 적이 있었다. "저 선수들은 너무 우승을 많이 해서 좀 지겹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농담 삼아 제네들은 테니스 코드 구석구석을 다 머릿속에 외우고 있겠지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사실이 있다. 그렇게 수없이 오랫동안 윔블던, 파리, 뉴욕 그리고 멜버른을 돌아다니면서 그랜드 슬램 토너먼트를 출전하고 우승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매번 긴장하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첫 1회전 경기라고 한다. 


설령 바로 전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했거나 지난 대회 그랜드 슬램에서 챔피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다시 똑같은 도시에서 똑같은 코드에서 경기를 하지만 지나간 경기는 그것을 끝이고 토너먼트는 늘 새롭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리고 새로운 토너먼트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은 준결승이나 결승전이 아니라 First round였다고 했다. 왜 그럴까? 그렇게 대단한 슈퍼 스타플레이어도 First round는 말하자면 또 새로운 시작이니까. 그래서 지난해 챔피언이 일 회전에서 무명 선수에게 패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처음에는 참 이해가 안 되었다. 랭킹으로만 보면 분명 실력차가 너무 나는 것이 뻔 한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그렇게 대단한 스타플레이어들이 긴장하고 그래서 실수하고 결국은 멘털이 무너지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슈퍼스타플레이어도 늘 새로운 시작에서는 두렵고 긴장되고 불안한 법이다.


테니스뿐만이 아니다. 골프는 더 심하다. 바로 앞 대회에서 우승한 플레이어가 다음 경기에서 컷오프 되어서 예상외로 탈락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런 점에서 타이거 우즈가 정말 대단한 플레이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플랫폼 기획에도 First round 같은 것이 있다. 최근에 2년 동안 했던 신규 플랫폼 기획 및 개발 프로젝트를 다른 기획자에게 넘기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했다. 회사에서 전략적으로 보고 투자하기로 한 신규 플랫폼 서비스를 기획하는 일을 맡았다. 


한 우물을 계속 파는 것도 좋지만 2년 넘게 한 곳에 있다 보니 답답하기도 하고 슬슬 나 스스로가 딜레마에 빠지고 뭔가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고 있는 찰나에 매니저가 추천을 해서 수락을 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것에 기분이 새롭고 약간의 흥분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새로운 팀을 짜고 기획서를 만들어 가면서 왠지 모른 불안감, 두려움 그리고 걱정들이 몰려와서 점점 스트레스로 쌓여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회사 티룸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매니저가 와서 새로 시작하는 것은 어떠냐고 넌지시 묻길래 솔직한 심정을 공유했다. 그랬더니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나갔다

네가 여기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5가지만 노트에 적어봐

차를 다 마시고 자리로 돌아와 방금 전 매니저가 했던 말대로 5가지를 적어 보았다. 그렇게 적고나 보니 문득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면서 나름 좋았다고 했던 그 5가지 프로젝트에서도 기억해 보면 항상 처음에는 두렵고 긴장되고 그랬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결국엔 해내었다. 갑자기 가슴이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누구나 시작은 늘 힘들다. 10년을 넘게 일한 배트랑도 1년도 채 되지 않은 주니어도 다 똑같다. 새로운 시작에 인간은 늘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혹여 실패하는 것 아닌지 아니면 혹여나 나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는지 후회하기 마련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2주전에 새로 시작한 기획에서 나는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있다. 하지만 불안했던 지난 2주간의 순간들은 이제 다 지나갔다. 마치 긴장되었던 First round는 이제 끝났다. 앞으로의 시간은 나 자신을 믿고 그리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믿고 나아가면 된다. 


혹시 새로운 시작을 했거나 그래서 불안하고 긴장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면 자신이 잘했던 5가지를 적어 보세요. 그러면 나 자신도 꽤나 쓸모가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두려움과 공포에 밀려 있던 자신감이 앞으로 나오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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