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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M Nov 18. 2024

감기 :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한국도 이제 기온이 뚝 떨어지고 추운 겨울이 온다고 들었다. 그곳에서 살 때 겨울이 되면 늘 감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서 나는 겨울이 사계절 중에서 제일 싫다. 딱히 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겨울에 좋아하는 것들이 별로 없다.


여기 호주(시드니)는 한국과 계절이 반대다. 여름으로 들어가고 있다. 호주에 이민 와서 좋았고 신기했던 것 중에 하나가 일 년 내내 감기를 거의 안 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하더라도 아주 약하게 쓱 지나가는 정도. 그것도 그럴 법한 것이 시드니는 한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일은 아예 없고 아주 춥다고 하는 날씨가 영상 10-15도 정도다. 그래서 처음 이민 와서 날씨 덕을 참 많이 본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다. 이민 온 지 15년이 지나고 이제 호주 사람 다 됐다. 현지인들처럼 겨울만 되면 춥다. 온도랑은 상관없다. 이게 말이 되나라고 물을 수 있지만 정말이다. 그래서 가끔 한국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대화를 하다가 그분들이 겨울인데 안 춥다고 말하면 속으로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었구나"라고 지래 짐작을 하곤 한다.


올해는 겨울을 무사히 지냈다. 감기도 없이. 그런데 늦게 온 것일 뿐이었다. 최근 들어 두 번의 감기에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컨디션 조절도 하고 약도 먹고 나름 운동도 한다고 생각하고 위생 관리도 신경을 쓰지만 감기는 늘 느닷없이 찾아오는 나쁜 손님이다.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중에 하나다.


평소 같으면 상관없지만 만약 중요한 시기에 감기가 이렇게 오면 참 곤란하다. 해야 할 일을 많고 나의 이메일 답장을 기다리는 팀원들을 생각하면 이런 감기쯤은 그냥 무시하고 참고 일을 해야 하지라고 생각이 들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고는 꼭 그럴 경우 생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내가 뭘 어떻게 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Let it go라는 생각으로 보내야 한다. 감기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일은 매니저에게 넘기고 따뜻한 티를 소파에 누워서 마시면서 쉬어야 한다.


다행히 호주는 아프면 병가를 사용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수월하다. 그냥 매니저나 팀장한테 전화를 하거나 그것도 곤란하거나 귀찮으면 문자나 이메일로 오늘 아파서 병가 휴가를 쓰겠다고 하면 된다. 그 무슨 엄청난 일이 있어도 별로 상관없이 승인이 떨어진다. 지난번 연재에서 말했듯이 호주의 팀장이나 매니저들은 직원들의 가족이나 개인사를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휴가를 쓰는 경우는 무조건 승인을 해준다. 회사 일이야 다른 직원이 하던지 아니면 연기하면 되는 것이다.


제품 기획을 진행하고 개발 프로젝트를 리드하다 보면 가끔은 이렇게 감기처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무슨 일이 생기곤 한다. 팀원들은 나만 바라보고 있으며 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올 때가 있다. 참 난처한 순간들이다.


한국에서 큰 프로젝트의 PMO를 리드할 때가 있었다. 규모가 워낙에 크다 보니 회사 내부에서도 무척이나 관심이 높았을 뿐 만 아니라 고객도 늘 조심조심 움직였다. 당시 나의 역할은 각 프로젝트 파트들에게서 나오는 산출물의 품질을 체크하고 진행 스케줄을 점검하는 전체적인 타워 컨트롤 역할을 하는 일이었다. 각 파트들은 우리 회사에서 고용한 각기 다른 협력사들이 맡아서 일을 하는 구조였다. 그러다 중간에 협력사들과 우리와 신뢰가 깨지는 일이 발생했다. 역시 한국은 어디든 정치가 있다. 협력사들이 고객 직원들과 직접 다이렉트로 뭔가를 진행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일이 터져 버렸다.


사건이 너무 크게 터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도 본사에 보고를 했어야 했고 나의 팀장에게 직접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조용히 팀장에게 S.O.S를 쳤다. 도와 달라고. 당시 내가 생각하기에 그 사건은 내 선을 분명히 넘었고 나의 통제 범위를 완전히 넘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본사와 팀장에게서 돌아온 것은 알아서 해결해라는 간단한 메시지였다. 당시 참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기억으로 남는다. 결국 마무리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팀은 너무 큰 타격을 받았었다.  


최근 지금 다니는 회사의 플랫폼 개발 프로젝트 팀에서 문제가 생겼다. 자세히 들여다본 후 결론은 나의 통제 범위를 넘어선 이슈다라는 것이었다. 바로 직속 메니져와 관련 stakeholder들에게 정리를 해서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매니저에게는 따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했다.


다음날 나의 매니저뿐만 아니라 그 이메일에 있던 다른 메니져들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다 비슷한 내용이었다. "공유해 줘서 고맙다. 이런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어서 미안하다는 위로와 함께 이건 네가 혼자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풀어야 할 것 같으니 기다려 줘"라는 메일이었다.


결국은 그 문제는 2달이 걸려서 사장의 결제가 떨어진 후에야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 그로 인해 제품 개발의 지연은 당연한 결과였고 그것을 리드하던 나도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하지만 아무도 그 지연에 대한 이유나 책임을 더 이상 나에게도 팀에게도 묻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비유가 있다. 제품의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그것을 실제로 개발해서 시장에 내놓는 과정은 농부가 1년 농사를 짓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벼농사를 하다 보면 여름에 태풍을 이겨내야 한다. 태풍이 올 것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언제 올진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혹여 그것이 언제 올 것이라고 예상을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실상 태풍이 오면 농부는 그냥 그것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 이기 때문이라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큰 그림으로 문제를 보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 맞다. 태풍과 같이 재난으로 벼가 쓰러지고 피해가 심하면 정부에 얘기하는 것이 우선이다. 왜냐면 나의 잘못이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렇듯 감기나 태풍처럼 잘 알고는 있지만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에 대해서 우리는 늘 통제할 수 없다. 그냥 빨리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빼고는 말이다.


Just let it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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