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나 비뇨치, <시의 사회적 임무>
만일 모든 삶이 우리네 삶과 이어진다면
나 단어 하나를 남기고 싶다
추억들로 야속한 이 오후들에
누군가를 감싸는 단어 하나를
후아나 비뇨치, <시의 사회적 임무>
아르헨티나 공산당원인 후아나 비뇨치의 시 중에서 유달리 짧고 간명하며 따스한 시가 있다면 이 시일 것이다. <시의 사회적 임무>라는 엄중한 제목에 싸인 시에는 프로파간다도 이데올로기도 없다. 그저 뉘엿뉘엿 지는 해 가운데 서 있는 외로운 누군가와─그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을 뿐.
"만일 모든 삶이 우리네 삶과 이어진다면/나 단어 하나를 남기고 싶다"는 말. 이 말에는 현재 "우리네 삶"과 "모든 삶" 사이의 단절이 전제되어 있다. 간극을 잇는 것, 전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언어일 테다. 그렇다면 "모든 삶"에 전달하고픈 "단어 하나"는 무엇인가? 날카로운 단어? 무거운 단어? 엄중한 단어? 진지한 단어? 공격하는 단어? 주장하는 단어?
시인이 선택한 것은 "감싸는 단어"이다. "추억들로 야속한 이 오후들에/누군가를 감싸는 단어 하나". 추억(과거)으로 야속한 오후에 젖은 "누군가"에게는 곧 닥칠 밤이 두려울 것이기에, "모든 삶"에 "감싸는 단어 하나"를 남김으로써 "누군가"를 바라보아야 함을 전달하는 것이다.
왜 이것이 시의 사회적 임무가 되는가? 시란 세계를 새롭게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소외된 "누군가"는 세계에서 빗겨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가 빗겨난 사람을 발견함으로써 시는 낯설게 하기라는 자신의 예술적 특질과 더불어 인간을 위한 도구로서의 사회적 특질을 동시에 충족한다. 그러므로 후아나 비뇨치는 말한다. 시의 사회적 임무란 소외된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