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천한 것을 귀하게, 귀한 것을 비천하게 바꾸어 봅시다
추석 잘 보내셨나요? 올해는 유달리 긴 명절이었습니다. 추석 하면 아무래도 송편이지요. 어렸을 적에는 큰집에 모여서 큰 통에 담긴 반죽을 떼어서 송편을 만들고 했었는데, 이제는 다 추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부터 점점 친척 어른들을 만나는 걸 힘들어합니다. 왜 그럴까요?
친척 어른들과의 대화를 떠올려 봅시다. 오랜만이네. 그래, 몇 살이라고? 몇 살? 아이고, 언제 이렇게 컸대. 너무 마른 거 아니니? (혹은) 너무 살찐 거 아니니? 요즘 뭐 하니? (10대라면) 어느 대학 갔니? (20대라면) 애인은 있니? 취직은 했니? (취직 이후라면) 월급은 얼마나 받니? 결혼은 했니? (결혼을 했다면) 아이는 안 가지니? (아이가 있다면) 한 명으로는 안 돼. 최소한 둘은 낳아야지. 집은 있니? 어디에 있니? 얼마나 하니? 돈은 모았니?
그만 떠올려 봅시다. 친척 어른들이 하는 말이 얼마나 정형적이면 인터넷에 '명절 잔소리 벌금표'까지 만들어졌을까요. 대학 이야기에는 10만원, 결혼 이야기는 20만원, 외모 이야기는 30만원씩 붙여서 잔소리를 못 하게 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에는 짠기가 돕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른들은 왜 이러시는 걸까요? 명절 전에 모두 합숙소 같은 데 들어가서 같은 질문을 반복하자는 결의라도 다진 걸까요?
그렇다기보다 어른들은 그런 질문밖에 할 줄 모르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런 질문이라니요? 정상성에 대한 질문이지요. 정상성이란 무엇인가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 나 우리,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그런 것 말이죠. 다른 사람들이 들어볼 법한 대학,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 연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집… 세상이 규정하고 다수가 허락한 정상성은 평범平凡이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굉장히 좁은 문이죠. 많은 사람들이 그 문 주변을 서성거리고 머리를 집어넣으려 안간힘입니다. 통과하지 못하면 '보통'에서 탈락하니까요.
만약 조금 더 용기가 있다면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그런 것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있어요. 그러면 어른들은 아마 웃으실 겁니다. 그러고 말하겠죠. 아직 어리다, 세상 물정을 모르네, 라고요. 『어린 왕자』는 어른들의 태도에 신물이 난 '나'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보고 모자라고 읽는 것도 모자라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핀잔하는 어른들을 보며 말합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고요. 명확한 통찰입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 친구에 관해 얘기를 하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묻지 않는다. '친구의 목소리는 어떠니?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나비를 수집하니?' 하는 말은 절대로 묻지 않는다. '나이가 몇이니? 형제가 몇이니? 몸무게가 얼마니? 그 애 아버지 수입은 얼마나 되니?' 하고 묻는다. 그래야만 어른들은 그 친구을 알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엔 제라늄이 있고 지붕 위엔 비둘기 날아드는 아름다운 장밋빛 벽돌집을 봤어요' 라고 말한다면 어른들은 이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상상하지 못한다. '10만 프랑짜리 집을 봤어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만 어른들은 '야아, 참 좋은 집이구나!' 하고 외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합니다. 숫자는 각기 다른 가치를 계량화하고, 자본주의는 그런 가치를 화폐로 환산해 동일한 틀에 집어넣을 수 있으니까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외쳤던 이들도 점점 어른이 되어가면서 숫자와 돈으로 작동하는 세상의 논리에 휩쓸리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시를 읽어 봅시다. 오늘 읽어볼 시는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입니다.
짙은 곱슬머리가 떠오르는 모던보이 백석은 필명입니다. 본명은 백기행으로, 1912년에 태어나 1996년에 타계합니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은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며 문학과 영어에 소질을 보였다고 합니다. 백석은 1929년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 선발 시험에 붙어 일본의 아오야마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진학합니다. 1930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당선하고, 1934년에 졸업한 후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하게 됩니다. 영어 능력을 발휘하여 체호프와 조이스에 대한 글을 번역하기도 하지요.
1935년에는 「조광」에 시 「정주성」, 「여우난곬족」 등을 발표하면서 이름을 알립니다. 1936년에는 지금도 복간되는 시집 『사슴』을 출간합니다. 이후 백석은 가장 뛰어난 서정시인으로 평가받는데, 「학풍」에서는 백석에 대해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시인들이 과연 얼마나 이 고고한 시인에 육박할 수 있으며, 또 능가할 수 있었더냐"라며 극찬합니다.
백석은 당해에 조선일보를 퇴사하고 함경남도 영생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합니다. 이후 1938년에는 교직을 사퇴하고 1940년에는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근무하였으나 창씨개명을 하라는 압박이 심해지자 그만둡니다. 꾸준히 시를 쓰던 백석은 해방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북한에서 창작 활동을 안정적으로 이어갔으나 공산 정권의 문예정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문학 활동의 대부분을 중단하고 양강도로 쫓겨나 양 치는 일을 맡다가 1962년 이후부터는 창작을 일절 금지당합니다. 그리고 1996년에 사망하지요.
자, 백석에 대해 알아보았다면 이제 오늘의 시를 읽어 봅시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날에 읽으면 더 좋은 시이기도 한 「흰 바람벽이 있어」입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힌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힌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 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힌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늬 먼 아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서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늬 사이엔가
이 힌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조금 길지만 이해하는 데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이제 천천히 시를 읽어 봅시다. 일단 제목이 무엇인가요? "흰 바람벽이 있어" 입니다. 그렇다면 이 "흰 바람벽"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일단 바람벽이 무엇인고 하니, 집의 둘레를 짓거나 칸막이를 하기 위해 만든 벽을 뜻합니다. 화자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좁다란 방"이지요. "힌 바람벽"이라고 한 것을 보니 벽을 만들고 종이를 겨우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 "때 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는 화자의 궁색한 살림을 잘 드러냅니다.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는 화자의 욕망은 방의 냉기를 시사하지요.
게다가 화자는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한가요? 화자가 쓸쓸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쓸쓸하니 모든 것이 쓸쓸해 보이는 것이 바로 서정, 세계의 자아화 아니겠나요. 6행에서는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화자는 춥고, 가난하고, 외롭기까지 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던 와중 갑작스레 화자는 "어인 일인가"라며 놀라는데, 그 이유는 "힌 바람벽에/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기 때문입니다. 텅 비어 있는 흰 바람벽이 스크린 역할을 하면서 여기 있을 리 없는 어머니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그것도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는 모습이지요. 시퍼러둥둥한-차디찬-무와 배추가 지니는 푸른 이미지는 찬물에 손을 담그느라 새빨개졌을 어머니의 손과 대비되어 더욱 시리게 느껴집니다.
이와 더불어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두 번 반복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와 좁다란 방에 춥고 쓸쓸히 있는 "나"는 연결됩니다. 즉 "내 어머니"의 "가난"은 "나"의 가난이 선천적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두 번째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지요.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은 사랑에 대한 "나"의 깊은 애정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좁다란 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일까요? "그의 지아비"와 함께 있습니다.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고 있지요. "벌서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고 있"습니다.
춥고 좁은 방에서 홀로 감주라도 먹고 싶어하는 가난한 "나"와 나지막한 집에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 대구국을 끓이고 저녁을 먹는 "내 사랑하는 사람", 두 공간의 간극은 "나"의 고통을 배가하는 동시에 어째서 "내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해줍니다. "가난" 때문이지요. 이제 "나"는 춥고, 가난하고, 외로운데, 그 외로움이 사랑의 좌절로까지 심화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변화가 나타납니다. 흰 바람벽에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글자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글자들은 이런 문장을 만들어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라고요. 자, 여기서 무언가 다른 것을 확인했나요? "나"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나요?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 달라진 것이 하나 존재합니다. "높고" 라는 것이지요.
나의 가난, 쓸쓸함, 외로움은 나의 탓이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살어가도록 태어났"으니까요. 그로 인해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슬픔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뜨거운 것, 아무도 없어 쓸쓸하고 외로운 것, 사랑, 슬픔으로 가득한 생을 부여받은 것이지요. 다만 슬프고 외롭다 할지라도 이러한 삶이 비천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높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 '높은' 삶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당장 춥고 외롭고 쓸쓸한걸요. 그러자 또다른 글자들이 지나갑니다. 어떻게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지나가지요. '울력한다'는 '힘을 합하여 함께 일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글자들은 "나"를 위로하며 격려합니다. 혼자가 아니라면서 말이지요. 글자는 말합니다. "-하늘이 처음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는 것"이라고요.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하늘은 어째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나요? 라는 물음에 글자들은 대답합니다. 그것은 "하늘이 처음 세상을 내일 적"부터 있던 아주 오래된 것이며, 그렇기에 이 슬픔이 최초는 아닐 것이며,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넘치는 사랑과 슬픔"이 있기 위해서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아름다운, 그리고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와 같은 시인들과 같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시를 통해 '구질구질한' 가난함을 "하늘"의 뜻, 그것도 "세상을 처음 내일 적"의 뜻이며 그것은 부유함과 안락함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높음'의 필수적 요소로 재의미화합니다. 이때 백석이 일제강점기를 살았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일제강점은 식민자본주의에 기반하였으며, 그 당시 평안하게 살기 위해서는 현실의 식민 질서와 타협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일제 치하에서 국무원으로 근무하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는 것 등을 생각해본다면 '가난'이라는 것은 '높음'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함을 택한다는 것은 현실 질서, 식민 질서를 거부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요.
이 시에서 주목할 부분은 "흰 바람벽"과 "글자들"의 조합입니다. '벽에 쓰인 글자'가 신의 계시라는 상징을 기독교 성경에서 따 왔기 때문이지요. 다니엘 5장의 내용이 「흰 바람벽이 있어」의 인유인데, 바벨론 왕 벨사살의 연회 중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자를 쓰고 사라집니다. 누구도 이를 해석하지 못하였으나 신의 선지자인 다니엘은 이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며 교만함을 버리지 못한 죄를 탓하여 벨사살의 죽음과 바벨론의 분열을 예언한 내용이라 해석하였습니다. 그 말대로 그날 밤 벨사살은 살해당하고 바벨론은 분열합니다.
즉 이를 시에 인유함은 곧 "흰 바람벽"에 나타난 "글자들" 또한 신의 말이라는 위상과 상징을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화자가 고통스러운 나머지 환영을 보았다는 식의 해석을 방지하고 세상이 가난에 부여한 낮은 가치를 신의 높은 가치로 뒤집으려는 시적 시도가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백석의 시는 세상의 질서를 비틉니다. 가난은 비참하고 더럽고 구질구질하고 질 낮은 삶이라는 관점을 뒤집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같은 집을 바라보더라도 십만 프랑짜리로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서서 창가의 화분에 어떤 꽃이 피었는지, 무슨 색의 비둘기가 날아드는지, 벽돌의 색이 어떤지 생각하는 것이지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자연스럽다고 생각되는 현실 질서에서 한 발짝 떨어짐으로써 우리는 더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넓게 바라본다면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상력을 통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숫자의 감옥이 주는 팍팍함 뿐만이 아니라 오직 이 길밖에 없다는, 그것만이 '정상'이라는 감각입니다. 길이 하나뿐이라면 그 길에서 벗어나는 순간 남은 것은 좌절뿐일 테니까요.
세상은 시대마다 '정상적인 것'을 몇 개 정해 놓고 이를 추구하라고 합니다. 경주마처럼 차안대遮眼帶를 채우고 쓸데없는 주변은 보지 말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진짜' 세상은 레일 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레일을 포함한, 레일 너머의 전체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진짜' '세상 물정'을 새롭게 쓸 수 있지 않을까요? 흔히 듣는 '세상 물정'은 무엇이 있나요?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생각해 봅시다.
덧, 「아직은 시의 영토」에서 백석의 시들과 더불어 시인이라는 직업 및 게임을 함께 다룬 글이 있는데,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 보셔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