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의 가치란 온전히 나의 판단에 의한 것일까요?
파라텍스트를 기억하시나요? 김광섭의 시를 읽으며 이야기했었지요. 텍스트에 준하는para 텍스트, 작품 본문이나 대화 텍스트의 주변에 위치한 텍스트를 파라텍스트라고 했었는데요, 파라텍스트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마음』에서는 "시인이 번영치 못하는/시간에 왔다 간다"는 서문을 통해 시의 서정성이나 내면성이 현실과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했었지요.
특히 시집의 파라텍스트, 시인의 말이나 서문은 본문 못지 않게 시적인 경우가 많은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수록된 서문입니다. 초판본이 계속 출간되는 인기 있는 시집이죠.
보통 교과서에서 '여성적 어조'라고 규정한 시들의 대표격이 있다면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여성/남성적 어조'는 성별에 부여된 사회적 관념을 바탕에 둔 용어로, 여성적 어조의 경우 "작가의 정서적 태도나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간절한 바람이나 한, 애상감 따위의 분위기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어조"라고 하네요. 덕분에 김소월이 여성 시인인 줄 알았던 친구들도 있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한용운도 김소월도 모두 남성 시인입니다. 관념이란 무서운 것이네요.
그렇지만 한용운도 본명이 아니라는 사실, 아셨나요? 한용운의 본명은 한정옥입니다. 그러면 용운은 필명인가 하니, 그것도 아닙니다. 용운은 법명, 출가하여 스님이 될 때 받는 이름입니다. 한용운은 1879년에 충청남도 흥성에서 태어났습니다. 16세 되던 해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1년 뒤 설악산 오세암에, 1905년에 재입산하여 백담사에서 출가합니다.
1908년에는 일본을 방문하여 신문물을 시찰하던 한용운은 1910년 한일합방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훈련장을 순방하며 독립정신과 민족혼에 대해 강변했습니다. 이후 1919년 3.1 독립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했지요. 당시 최남선과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한용운은 독립선언문의 내용이 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1년 후 만세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른 이후에도 강연을 이어가며 독립의 정당성을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1926년에는 『님의 침묵』을 발표하였고, 1927년에는 일제 대항 단체인 신간회를 조직합니다. 1930년에는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힘씁니다. 출가 초기부터 한문으로 적힌 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집중했던 한용운은 승려의 자질향상, 기강확립, 생활불교를 제창하며 불교 쇄신에 힘썼습니다. 1938년에는 항일과 불교 혁신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 만당이 발각되며 당수인 한용운도 고초를 겪게 됩니다.
민족과 종교, 자신이 헌신한 모든 곳에서 혁신과 개혁을 설파하고 실천하던 한용운은 1944년 중풍으로 사망합니다. 해방 일 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면 이제 한용운의 시를 읽어 볼까요? 먼저 서문부터 읽어 봅시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부처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긔루어서 이 시를 쓴다.
한용운, 군말
자, 먼저 제목을 봅시다. "군말"입니다. '쓸데없는'의 뜻을 지닌 접두사 '군-'이 붙어 "하지 않아도 좋을 쓸데 없는 말"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이 글을 읽지 않고 한용운의 시를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한용운 하면 떠오르는 단어, "님"에 대한 설명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토록 중요함에도 "군말"이라는 이름을 붙어 오히려 아이러니함이 강하게 느껴지는데요, 찬찬히 읽어 봅시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기룬 것"은 무엇일까요? '기루다'는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거나 아쉬워하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리워하거나 아쉬운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군요. 구체적으로는 와닿지 않는데, 친절하게도 예시와 설명이 이어집니다. "중생이 부처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요? 도덕 법칙과 빛나는 밤하늘을 견준 칸트에게는 철학이 님일 수 있을 겁니다. 이탈리아 민족 해방과 독립을 위해 헌신한 마치니(마시니)에게는 이탈리아가 님이겠지요. 꽃망울을 펼칠 기운을 주는 봄비는 장미의 님이겠고요. 그런데 부처가 중생의 님이 아니라 중생이 부처의 님이라니요, 여기서 마지막 문장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님은 내가 사랑할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고요.
부처-중생, 철학-칸트, 봄비-장미화, 이태리-마시니라는 쌍을 볼 때 우리는 한쪽과 다른 쪽의 일방적 관계를 전제합니다. 관계에서의 위계를 상정해 버리는 것이지요.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낮거나 다른 한 쪽을 더 사랑하거나 하는 것처럼요. 그러나 「군말」은 이러한 관념에서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첫 문장에서부터 말하지 않았나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라고요.
"님", '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임'을 "전적인 사랑과 사모의 대상이 되는 사람"으로 다루고 있고, 고려시대부터 명확히 나타나기 시작한 '임'은 이성간의 사랑을 노래하면서 쓰이거나 임금을 향한 마음을 표현할 때 임금을 칭하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현대시에서 쓰이기 시작한 '임' 또한 이런 맥락을 바탕으로 사용되었지요.
하지만 「군말」에서의 "님"은 다릅니다. 위계적 애정이나 복종의 대상이 아닌 "기룬" 마음과 "내가 사랑할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상호성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이 "님"인 것이지요. 이후 문장도 읽어 봅시다.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인데, 너희들은 오히려 자유의 구속을 받고 있다고 말이지요.
이는 당시 유행했던 '자유연애' 사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이야 대부분 자유롭게 만나고 사랑하지만 20세기 초에 자유로운 연애란 그 자체로 신문물이었기 때문이죠. 한용운도 열네살에 성혼했습니다. 출가한 후 쉰다섯이 되어서야 재결합했고요. 그러니 집안의 간섭 없는 연애란 얼마나 좋은 것이었겠나요?
그러나 한용운은 그것이 정말로 "자유"인지 묻습니다. "자유연애"라면 나와 "님"이 자유여야 할 것인데 정말 자유로운지, 자유연애라는 틀에 묶여 있지는 않은지 말이지요. 자유라는 이름의 구속을 받는 너에게 님이 있다면 그것은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라고 지적합니다. '나'와 '너(님)'가 아니라 '나'와 '나의 그림자'라면 그것은 자유도 연애도 아닐 것입니다. 그저 자유의 포즈, 연애의 포즈밖에 되지 못하겠지요.
한용운은 「군말」을 통해 독자가 자연스레, 당연스레 생각하는 "님"과 "자유연애"에 대한 생각에 돌을 던집니다. 파문이 일어나고, 독자는 다시 생각해 보게 되지요. 『님의 침묵』을 쓴 이유 또한 "해 저문 벌판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이 긔루어서" 쓰는 것이기에 어린양도 한용운의 "님"일 것입니다. 길 잃은 어린양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목자의 마음일 테고요.
그러나 한용운의 "님"에 대한 인식은 슬프게도 너무나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님의 침묵」이 정전이 된 것은 축하할 일이나, "님"이란 곧 '절대자, 조국, 연인'이라는 자동답안이 튀어나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SNL의 「화산외고」는 영화 「화산고」의 패러디로 무력武力이 아닌 지력智力으로 자웅을 겨루는 화산외고를 배경으로 하는데, 퀴즈 대결에서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에서 '님'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의 답으로 '절대자, 조국, 연인'이 즉각적으로 제시됩니다.
어째서 '님'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으로 갈라질 수 있을까요? 종교적 절대자, 조국, 연인이 각기 다른데도 말이지요. "기룬 것은 다 님"이기에 「님」은 더욱 확장된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게 됩니다. 「군말」을 읽고 「님의 침묵」을 읽는다면 "님"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관념에서 벗어난 '님'을 말이죠. 앞서 이야기한 바를 생각하며 한용운의 다른 시, 「복종」을 읽어 봅시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금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복종
얼핏 읽었을 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복종을 좋아한다니요? 참 이상한 취향이구나,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자유"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를 모르는 상태에서 복종이라는 현 상태를 지속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앎에도 복종을 택하는 것이지요. 어째서일까요? 「군말」을 떠올려 봅시다. "너희는 이름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안너냐"를 생각해본다면 「복종」에서의 "자유"가 어떠한 자유인지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종이란 무엇인가요? 뜻 굽힐 복, 항복할 복에 좇을 종 자를 쓰는 것이 복종服從입니다. "남의 명령이나 의사를 그대로 따라서 좇음"이 복종의 사전적 의미이지요. 그러나 이 시에서의 복종은 사뭇 다릅니다. 4행에서 당신이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고 하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다며 거부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시에서의 "자유"와 "복종"이라는 것이 흔히 사용되는 일상 언어로서의 "자유", "복종"과 같은지 말이지요.
복종하는 자는 노예이며, 그에게는 판단 능력이 없습니다. 혹 있다 하더라도 판단의 몫을 주인에게 넘기고 그저 따르는 것이 복종하는 노예이지요. 노예는 복종하는 것 외에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종」의 화자는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에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니체를 잠시 가지고 와 봅시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명령과 복종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명령의 기쁨과 복종의 기쁨─ 복종과 마찬가지로 명령도 기쁨이다. 다만, 명령은 아직 습관화되지 않았어야 기쁨이고, 복종은 이미 습관화되었어야 기쁨이다. 새로운 주인을 맞이한 오래된 하인들은(노예들은) 주인을 기쁘게 하느라 열심히 경쟁한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권 1부 311절
복종이란 습관화되어야 기쁨입니다.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되어 그것이 습관이 되고 너무나 자연스러워지면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노예의 복종입니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결과를 감내하지 않아도 되는 안온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주인이 온다면 그것은 기쁨입니다. 그러니 누가 주인이 되는지는 노예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종하며 주인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하지요.
그러나 「복종」의 화자는 복종할 자를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이는 통상적인 의미의 "복종"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자기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에 복종하는 자가 곧 노예이나, 「복종」의 화자는 "당신"의 의지에 복종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니체에게 있어 "복종"이란 기존의 도덕, 가치 체계와 밀접한 관련을 지닙니다. 더 높은 자아, 새로운 도덕과 가치를 추구하며 자신을 극복하고 이를 통해 초인(위버멘쉬)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 니체에게 있어 "복종"의 대상은 필연적으로 자연화된, 즉 "습관화된" 체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복종함으로써 초월이 불가능해지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인간들 사이에 지금까지는 복종이 가장 잘, 그리고 긴 세월동안 이루어지고 훈련되어왔다. 모든 평범한 인간은 어떤 형식적 양심으로 "그대 무엇을 무조건 행하라, 무조건 행하지 말라"라는 타고난 욕구를 갖고 있다. 이런 욕구는 만족을 찾고, 그 형식을 어떤 내용으로써 충족시키려 한다.
그리하여 분별없이 게걸스럽게 손을 내밀어서,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든-부모건, 교사건, 법률이건, 계급적 편견이건간에 그 말하는 바를 받아들인다. 인류의 발견은 이상하리만큼 제한되어 있고, 자주 역행하고 회전하는데, 그 이유는 복종이라는 무리의 본능이 가장 잘 유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무엇을 무조건 행하라, 무조건 행하지 말라"라는 '자연화된', '습관화된' 복종을 질책합니다. 이것이 좋구나, 혹은 저것이 나쁘구나 하는 것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모건, 교사건, 법률이건, 계급적 편견"이 주인처럼 명령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관점이나 판단,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복종의 가장 나쁜 점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복종」으로 돌아가 봅시다. 「복종」은 "복종"과 "자유"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군말」을 함께 생각해 본다면 당대의 신문물인 "자유연애"가 과연 진실로 "자유"인지에 대해 되짚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알뜰한 구속"을 받는 "이름좋은 자유"가 정말 "자유"일지, "자유"의 반대항이자 전근대적인 개념으로 생각되는 "복종"이 정말 노예의 "복종"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도록 만듭니다.
시는 독창적이거나 흥미로운 방식으로 언어를 '낯설게'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복종」에 나타나는 언어를 생각해 보면 특이한 표현이나 두드러지는 운율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군말」에서 "님"의 의미를 "기룬 것은 다 님"으로 규정함으로써 일상 언어를 시적 언어로 확장하듯, 「복종」 또한 당대 유행하였던 "자유"에 대한 풍속적 인식을 '낯설게'하고 독자로 하여금 "자유"와 "복종"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히 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습관화된 관념을 낯설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고 했던 한용운의 의지가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생각하며 읽어 본다면 한용운의 시를 습관적으로 읽기보다는 보다 깊이 읽어볼 수 있을 겁니다. 나아가 현재의 삶에도 끌어올 수 있겠지요.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되는 것, 다들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들)이 진정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된 가치인지, 혹은 습관적인 복종의 결과가 아닌지 말이지요.
오늘도 귀한 시간을 내어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시를 읽는 방법」은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지원할 예정이라 신청 후 작성과 수정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더 나눌 이야기가 많지만 더 많은 이야기를 위해 잠시 이 장에서는 쉬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발표가 끝난 이후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그동안 브런치와 매거진에서 시와 책, 영화나 드라마 등 다양한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니 그 사이에는 아래 링크로 찾아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날이 많이 추워졌는데, 건강 조심하시고 즐거운 나날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