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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19. 2024

누군가의 세계, 누군가의 내면

1.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11)

알바를 가느라 항상 지나다니는 길이어서 카페 건너편의 그 공방은 몇 번 바깥에서 본 적이 있었다. 조금 거리가 있어서 흐릿하게 보이는 진열장 안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어도, 바로 출입문 옆에 보이는 통유리 너머의 덩치가 있는 인형들은 늘 이진우의 시선을 끌었다.

애니메이션도 영화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세계에서 무리 지어 살고 있을 것 같은 동물들. 희한했다. 인형, 그것도 말랑한 봉제 인형도 아닌 딱딱하고 온기 없어 보이는 딱딱한 도자기 인형에서 그런 포근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몰랐다.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흔히 보던 공장형 봉제 인형들이 제대로 동그랗게 마감한 마침표 안의 세상에서 몸을 말고 있는 것 같았다면, 공방에 있는 인형들은 희한하게도 쉼표 같은 느낌을 주었다. 보고 있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낚싯바늘이라도 달고 있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서 자신들을 봐 달라는 것 같은 무언의 호소를 건네오는 것처럼.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자기의 하잘것없는 삶도 쫑긋 귀 기울여 들어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인형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다만 어딘가 애틋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도자기 인형은 이진우가 지갑을 선뜻 열기엔 상당한 고가였다. 그저 오며 가며 눈도장을 찍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네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수업 홍보물에 기재되어 있는 수업료는 이진우가 예상한 것보다는 저렴했고, 그 수업을 들으면 어설프게나마 그런 것을 자신도 만들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은 이진우를 상당히 설레게 만들었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친 이후부터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는 있었으나 목적을 먼저 생각하고 모으는 돈이 아니었다. 이래저래 살면서 겪은 바, 진우는 빈곤함이 부채질하는 욕망의 지분은 생각보다 크다는 삶의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그간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던 물건이, 또래들과 같은 경험을 해보고 싶었던 욕심이 뜻밖에도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손에 들어오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체험들은 이진우에게 특이한 기준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바로 그 욕구를 이룰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생겨도 여전히 하고 싶은 일에, 갖고 싶은 것에만 돈을 쓰자는 것.

그것이 그가 어디에 돈을 쓸지 결정하는 근거가 되어주었다.


이진우의 마음속에는 항상 천칭이 하나 있었다. 한쪽에는 몇 달간의 숨 돌릴 틈 없는 노동의 결과로 손에 쥔 돈의 총액을 놓는 저울판, 그리고 반대편에는 그 가치에 상응할 온갖 것을 올려놓은 저울판이 있었다. 그곳에는 근사한 한 끼의 식사, 누구든 침을 꿀꺽 삼킬 만한 최신형 핸드폰. 유행하는 재킷. 장기간의 배낭여행. 혹은 낡아빠진 신발을 대신할 새로운 신발. 결국 이진우는 한 켤레의 새 운동화를 새로 장만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누리고 그 가치를 실감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의 사치는 부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남은 돈은 없는 돈이었던 것처럼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홍보물을 본 이후부터 이진우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다. 이 정도면, 써도 괜찮지 않을까. 그만한 액수의 돈은, 조금 잠을 줄여서 야간 알바를 하나 더 뛰면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갖은 변명거리를 떠올리던 이진우는 씩 웃었다. 이 정도로까지 뭔가가 하고 싶어진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고, 이만한 열망이면 그 정도 액수의 돈을 쓴다고 해서 뒤에 가서 후회하지는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 


에오오옹.


아직 집에 고양이와 함께 있는 것이 익숙지 않았던 김은지는 발목을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운 털 때문에 화들짝 놀랐다가 나 여기 있어요, 뭐 잊어버린 거 없어요? 묻듯 쳐다보던 고양이를 보다가 앞이마를 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미안. 배고프구나? 내가 아직 너랑 있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나예가 알면 서운해하려나 생각하며 김은지는 고양이에게 사료를 적당히 덜어주고 다시 스마트폰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마침 그 공방의 SNS 계정을 찾아 들어온 참이었다. 작은 도자기 인형들이 마치 모델 프로필 사진처럼 서너 컷씩 연달아 붙어 있었다. 사진이야 그러려니 슥슥 훑어본대도 그 밑에 붙어 있는 설명엔 절로 눈이 붙박였다. 그러니까 김은지 같은 성향의 사람은 도무지 그런 것을 대강 보고 지나갈 수 없었다. 


인형 하나하나에 프로필이 붙어 있었다. 이름만 빼고 모든 것이 다 있었다. 나이, 태어난 곳, 좋아하는 것, 버릇, 습성, 기타 등등. 도대체 도자기 인형에게 이 거창한 프로필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수도 있었으나 김은지는 그런 세심한 역사를, 자신의 창작품 하나하나에 만들어 붙여준 사람이 누구일지가 몹시 궁금했다. 자신의 삶을 야무지게 가꾸어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빚은 존재들마저 이렇게 다정한 세계에 자리 잡을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 가르치는 수업이란 어떤 것일까 알고 싶었다. 김은지는 SNS앱을 닫고 문자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 


퇴근하고 돌아온 윤소은은 벗어둔 외투와 가방을 정리하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학교에 일하러 갈 때의 윤소은은 완벽한 무채색이었고, 집에 돌아온 뒤의 윤소은은 자연의 색이었다. 초록색, 베이지색, 어디에서도 쉽게 녹아들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바탕의 색. 그녀가 좋아하는 색이란 그런 것이었다. 가능한 한눈에 띄지 않는,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레 어딘가에 녹아드는 색, 자신의 존재를 크게 웅변하지 않는 색.


무슨 까닭에서인지 도무지 그녀가 좋아한 적 없었으나 유난히 사랑스러운 색감을 입고 있던, 카페에서 보았던 티포트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도자기 동물들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런 색상을 거침없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의 내면은 나처럼 불행한 적도, 우중충한 적도 없었겠지 생각한 윤소은은 잠시 고민하다 말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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